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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종손의 아호를 따서 지은 '강숙재'(ⓒ안동MBC)
금슬이 좋으셨나봐요?
뭐, 하여튼 영감님 마음이 너무 착해. 날 보고 ‘왜 이랬노?’ 소리 평생 못 들어봤으니까요. 그리고 나보고 '당신이 참 좋은 점은 어떻게든지 이렇게 동기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은 참말로 당신이 너무너무 잘한다'고 그렇게 칭찬해줬었지요. 그리고 내가 마당에 나있는 풀을 뽑으면 저 문 열고 '그만 들어오소, 풀은 그만 뽑고 나하고 놀자' 이렇게 하고 그랬지요. 그게 지금도 자꾸 생각이 나, 풀을 뽑으면 그 생각이 나요. 여든 여덟에 내가 여든 여섯에 가셨으니까 4년 됐네요. 그때 가는 날도 아침 식사 잘 하시고, 내외간에 커피 마시고, 안방에 와서 둘째 아들하고 전화해서 아들이 온다고 하니 좋아서 그러셨는데, 그러고는 내가 밖에 나가서 한 20분 있으니까 그만 돌아가셨어요. 편하게 가셨지.
이렇게 큰 종가인데 시집살이는 안 하셨나요, 그럼?
없었어요 시집살이. 우리 시어머니는 훌륭하셨어요. 시집살이라는 건 모르고 살았어요. 우리 어머님은 누가 놀러 오면 '야야, 어서 온나. 여기 화투치자' 이러시고 할 정도로 좋으신 분이었죠. 백수를 하셨어요.
오늘 제사상 준비로 분주하네요 종가가?
내일이 서애 선생 시사예요. 시월 초하루 날. 시사는 산에 가서 제를 모시는 게 보통인데, 다른 집안 사람들은 8월 추석에 모두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10월 초하룻날 지네요. 그리고 차사도 9월 9일에 지내지 8월 추석에는 안지내요. 8월에는 아직 신곡이 안 나오거든 조상님한테 햇곡식, 햇과일을 올려야 하니까요.
1년에 몇 번이나 제사를 지내십니까?
1년에 열한 번. 한 달에 뭐 두 번도 있고 그래요. 5월, 7월, 8월에는 두 번씩 있어요. 8월에는 우리 시어머니, 시조 모님, 또 이제 우리 영감 제사도 8월이라. 이제야 뭐 상차림 할 때 위에서 지시나 하지 직접 뭐 밥하고 이러진 않아도 돼요. 그래도 책임이 무겁기는 하지요. 우리 충효당은 불천위가 두 분인데, 대종가인 양진당은 서애 선생 부모님까지 계시고 하니, 거기는 불천위가 네 분이라. 형님(겸암 선생) 내외분, 부모님 내외분. 1년 불천위라고하면 4대 봉사가 지나도 계속 제사를 지내는 거야. 그래서 항상 종부도 애 먹어요. 우리는 두 분 지내는 것도 어렵다고 하는데 말이예요.
말씀처럼 종가의 기본이 봉제사 접빈객이라고 표현을 하던데 어떤 의미일까요?
종가 종부의 책임이 그거예요. 봉제사는 조상님 제사 잘 받들고 접빈객, 오는 손님에게는 물 한 잔이라도 정성스레 대접하고, 그게 종부의 책무라고 할까 본분이라고 보면 되죠. 우리는 제사 때 정성스레 음식을 차렸었어요. 옛날 내가 시집오기 전에는 서애 선생 제삿상에 소도 한 마리 잡고, 돼지도 잡고 기름 한 말씩 짜고 오탕을 했어요. 탕이 다섯 가지라. 정승을 하셨으니까 오탕, 임금은 칠탕이고, 명나라 황제는 구탕이라. 오탕에는 육탕, 계탕, 소탕, 아무 것도 안 넣는 나물만 넣는 탕, 그리고 병산 앞에 민물고기로 만든 어탕까지 다섯 가지죠. 그리고는 생고기 쓰고 떡하고 나물하고 탕하고 과일하고 그렇게 하는 거지요.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는데 생고기를 끼워서 나머지 한 가지씩 넣어서 가는 거죠. 그러면 하룻저녁 반찬거리는 되는 거죠. 음복은 조상 제사에 복을 받는다고 다 가져가라고했죠.
그럼 접빈객 때는 친정에서 배워 온 경주 법주를 내 가겠네요?
경주법주 다르고 교동법주가 달라요. 우리 친정이 경주 교동이거든. 교동법주는 시중에 파는 법주하고는 달라요. 교동법주는 찹쌀로 해서 한 달쯤 숙성시켜야 해요. 찹쌀하고 누룩하고 겹술을 해요. 고두밥으로 술하면 그 맛이 들 때까지 한 달 동안 숙성시켜서 만들거든. 우리 클 때는 방에 술 단지가 떠날 날이 없었지요. 손님 대접도, 제사도 그 술을 쓰니까요. 그 술 떨어지려고 하면 또 담고, 또 담고 그래서. 그것도 이제 내가 살림 살 때는 했는데. 이제는 물려주고는 애들은 애들 지 솜씨로 딴 술을 해요.
손님을 정성스레 맞이한다는 것이 참 의미가 있습니다. 충효당 종가는 늘 이렇게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봐요?
그럼요 현직 영국 여왕 오셨다 갔지요 또 현직 대통령도 오셨었지요. 노 대통령 그리고 이번에 문 대통령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도 퇴임 후에 다녀가셨으니까요. 노대통령 오셨을 때는 점심을 했는데 우리 집에는 앉을 데가 비좁고 해서 대청이 너른 양진당에서 모셨는데 그때 내가 경주에서 계란 200개를 떠서 수란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모두 오신 분들 대접을 했더니 이게 뭐냐고 하면서 먹어 보니 맛있네 그러더라구요. 하여튼 나는 내 힘껏은 물심 양면으로 집을 위해서 일을 했거든. 몸이 고달파도,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하면서 견뎌냈죠. 그래 참 이제는 살만큼 살고 나니까 뭐 지금은 모두 종부, 종부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옳게 하지는 못해도 또 동네서 그렇게 평을 해주니 고생한 보람이 있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정말 큰 손님도 한 번 치르셨죠? 대청에 보니까 줄이 하나 내려져 있던데?
그거는 여왕이 마루에 올라 갈 때, 잡고 올라가라고 매달았었지요. 보통 그것은 사랑 마루에 매는데 그때 여왕 온다고 그걸 했어요 잡고 올라가게. 여왕님이 신 벗는 것도 여기서 처음이었고, 당신이 동양의 풍속을 따라 주신거지요. 사실은 여왕님 오시기 전에 영국대사 부인 내외가 두 분이나 여기 우리 집에 왔어요. 한 번은 와서 저 사랑방에 자고 그때 겨울에 한참 추울 때 코트를 입었는데도 덜덜 떨고 했지요. 그랬는데 안방에서 따뜻한 밥을 대접하고 했더니 나중에 그 분들이 그랬나봐. ‘동양에 가보니 참말로 하회라고 하는 데가 좋다’고 그 후에 여왕이 오셨지. 마을이 야단이었죠. 여왕 오셨을 때는 밥을 않고 차랑 떡하고 과일을 곁들인 다과상을 차려 드렸지요.
그럼 그렇게 궂은 일 마다하지 않았던 종부 자리는 언제 물려주신 거예요?
종부로 집안을 물려받은 지 45년 되던 해라. 우리 영감 돌아가시고 길사라고 종손, 종부 되는 행사가 있어요. 그 행사는 거창하게 했는데 그 이후로는 살림을 아랫대한테 다 물려줬지요. 길사라는 것이 30년에 한 번씩 하는 거예요 대를 바꾼다는 의미도 있고 임금님이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때는 참 시원했어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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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사 이후로 살림을 아랫대에 물려줬다.(ⓒ안동MBC)
종손인 아드님 낳았을 때도 참 기쁘셨겠어요, 제사를 받들 자식이 태어났으니까요. 혹 시아버님이 상이라도 주시진 않으셨어요?
그때는 상 같은 건 모르고 낳아 놓고 보니까, 나는 세상 걱정이 없어지더라고. 어쨌든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났으니 종손으로 교육은 해야 했었는데 따지고 보면 뭐 특별한 교육은 없었던 것 같아요. 자기가 듣고 보고 직면교화로 그리하지 뭐 이렇게 옛날부터 엄하게 교육시키고 그런 건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 보면 잘하고 있어요. 한 가문의 종손은 문중을 받들고 세워야 하는 직분이 있는 거니까 자기 혼자 가정 하나 꾸리기도 힘든데 이 문중을 다 거느리고 하자니까 힘든 일이지요. 그럼에도 종손이 잘못하면 또 남의 문중에서 욕하고 하니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죠. 특히나 서애 선생 같은 훌륭한 조상의 뜻을 받들어서 살아야 하니 자기가 빗나가거나 하면 큰일 나지요. 살아도 늘 조심조심해야 하는 것이구요.
그렇게 또 대를 이어가야 할텐데 그 일은 잘 되고 있습니까?
이제 나도 손부를 봐야 되는데 이런 종가에 누가 올까 걱정이 되지요. 요즘은 맏이한테도 시집 안 가려고 하는데 종가 오기가 진짜 어렵잖아 종부 구하기가 어려워요. 그래 한 20년 전인가 한 번은 고려대 지리학과에서 학생들이 구경을 왔어요. 이런 집에서 살면 좋겠다라고들 하길 래 내가 “여기 종부로 올 사람 누구 있노”하니까 “막 저요! 저요!” 이러더라고, 그때는 우리 손자가 고등학교 때라 “아직 고등학생인데…” 했더니 “연상의 여인도 안 좋습니까” 이러더라고 요즘 아이들이 허허. 그런데 진짜 이제는 종부로 시집오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난 어서 손부 봐서 혼인하는 거 보고 깨끗하니 가면 좋겠어요.
다시 태어나서 서애 종가 종부하라고 하면 하시겠습니까?
종부라는 것이 내 식구 먼저 위하기가 참 어려워요. 이 큰 집을 지키고 조상 모시고 손님 대접하고 해야 하니까 귀한 거 있으면 진짜 영감 못 드리고 남을 우선했었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어째서 남을 위해서 사는가 싶기도 했고, 우리 식구는 뒷전이고 당장 손님을 치뤄야 하니까 참 어려웠어요.
나는 45년 종부로 있어서 지금도 생각하면 그래요. 돌아가신 우리 영감님한테도 그랬어요. '나는 다시 태어나면 종손 되고 당신은 종부되소' 했었지요. 종부 일이 너무 많아서 종손은 가만히 있어도 되지만. 이제는 안 하겠어요. 그래서 내가 종손 될라 했지. 종부는 안 하고 싶다 했지요 허허.
* 본 글은 『기록창고』 3호에 수록된 내용이며 E-book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