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돌리는 손님 있을까봐 쉬는 날이 없다”
뱅가드 신발
▲ 뱅가드 신발(ⓒ강수완)
한 가지 업종에 거의 반백년을 몰입한다는 일은 장사 길로 들어서서 쉬운 일이 아니다. 업 자체가 신발점이라면 호락호락한 장사는 아니었을 터, 여기 안동에서 신발로 거의 50여년 세월을 살아온 상점이 있다. 상권의 움직임에 따라 한 번 이전은 하였으나 이후 지금의 자리에서 꼼짝 않고 문을 열고 닫는 신발점 뱅가드. 안동에서 〈부종대 신발〉을 기억하는 이의 연령은 아마도 얼추 반백년 넘은 나이에 들지 않을까 싶다. 나이 든 사장님의 일갈이 근 50여년 운영했다며 소리 없이 빙긋 웃었으니까.
신발업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선 안동버스정류장이 처음 있던 자리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통일여객으로 지칭되기도 했던 안동버스정류장의 위치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중장년을 넘었으리라. 요즘은 영어와 한자를 섞어 안동버스터미널로 명칭 하였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버스 정류소 혹은 버스 정류장 또는 버스 정거장으로 부르거나 물으면 통용되어 서로 알아듣는 곳이었다. 좀 더 자세히 표기 하자면 안동시외버스정류장일 것이다. 안동 인근의 각 군 단위 지역이거나 더 큰 시 지역으로의 이동을 위해서는 시외버스정류장을 필히 거쳐야 했으므로, 최근에 버스 정류장이 있던 위치를 물으면 선뜻 장소를 기억하거나 대답하는 이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홈플러스 거대 상업 건물이 들어 선 자리를 기억하는 사람에 비해 굳이 말하자면 나이 든 사람들의 기억 속 버스정류장은 어디일까? 시내 중심가에 있던 운흥동 버스정류장이 현재의 송현동 (경동로 130번지) 버스터미널로 이전한 날짜가 2011년 1월 24일 이었으니 꼬박 10년이 넘었다. 운흥동 시내의 버스터미널은 1969년 생겼다. 옮기기까지 근 40여 년의 오랜 세월 동안 쇠락한 건물과 좁은 공간으로 인해 2000년부터 시 외곽으로의 이전 계획을 논의 하면서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하나로 통합한 종합버스터미널이 서안동 IC와 가까운 곳인 지금의 송현동으로 옮겨 갔다.
한 번 더 물어 보기로 하자. 그렇다면 운흥동으로 이전하기 전의 버스터미널 터는 과연 어디였을까. 선뜻 대답하는 사람 또한 연배가 얼추 되었을 법 하다. 단정적으로 자꾸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뱅가드 신발점 사장이 똑같이 물어왔을 때 안동토박이임에도 잠시 우물쭈물 거렸으니까. 한참 생각해도 갸우뚱 거리는 걸 보더니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또 한 번 빙그레 웃었다.
초창기 안동터미널은 서부동에 있었다. 지금의 중소기업은행이 자리한 터가 바로 옛 안동시외버스정류장이었다. 말하자면 그 자리가 안동 상권의 요지였으며 물동량과 인구 이동이 가장 많았던 곳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의 신한은행 자리, 즉 옛 조흥은행 자리와 동서로 일직선이 되는 거리가 일제강점기의 주요 도로이자, 당시 기침 꽤나 하는 안동의 알짜 양반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니 일면 납득이 가는 자리였다. 그곳에 안동시외버스정류장이 생기고 주변의 상권들이 점점 중심가 역할을 하였으리라. 정류장 근처에 가게를 열었다면 당시는 주요 금싸라기 땅이었다. 개인 자가용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 정류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옥수수 알처럼 많았을 터. 그 근방에 〈부종대 신발〉 간판을 걸고 점포 문을 열었다니 상권을 독점하였으리라는 짐작이 든다.
경안고 12회 졸업생이라는 현재의 사장님은 실제 48년간 신발점을 운영해 온 안동의 신발업 최고참이자 최고령에 가까운 이력의 노장이다. 신발 한 가지 품목으로 그 오랜 세월을 묵묵히 왔다니 상업에 일가견이 있는 건 틀림없는 일로 여겨진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던 해, 사촌 형님의 부종대 신발점에 장사를 돕기도 하고 배우기도 한다는 생각으로 뛰어 들었다. 당시 부종대 신발점의 위세는 대단하여 매출이 좋았다. 직원도 몇 두고 있던 터라 중간관리자 정도로 들어가 장사의 처음을 익혔다.
사실 공부를 조금 잘하기도 하여 졸업하고 그 당시 안동 교대 2회로 바로 입학해 교사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나중에 부부교사로 삶을 꾸려 가고 싶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 운동을 좋아하여 육상과 여러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이 지금까지 장사를 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실제로 동년배에 비해 꼿꼿한 허리가 친구들에게 부러움이 되었다니 호리한 몸이 건강해 보였다. 다만 요즘은 녹내장으로 눈이 안 좋아져 신발 팔 때 조금 불편하지만 손에 익은 일이라 그럭저럭 즐기며 하고 있다. 여든둘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도 올곧고 밝아 편했다.
숙부되는 어른이 안동에서 신발업을 크게 시작했다. 8.15 해방 직후에 부산 국제고무의 회장이 범일동에서 신발을 만들어 전국 각지에 판매점을 낼 때 안동에서 강원도까지의 대리점 판매권을 받아왔다. 숙부는 선친의 둘째 동생으로 안동의 경안양조장과 삼화소주 도가의 주인이었다. 길안 양조장과 임동의 구도가와 신도가를 운영하였고 대구의 봉덕양조장의 주인이기도 하였다. 대구 중앙시장 안의 코스모스 백화점도 운영했다. 청송의 청운 양조장을 계약해 놓고 대구로 가는 버스 안에서 교통사고로 갑자기 명을 달리 하는 바람에 숙모님의 권유로 한 살 차이 나는 사촌형님과 둘이 신발점을 받았다.
그때의 신발 판권은 대단한 재력을 보장 받는 일이라 대학을 포기하고 장사 길로 들었다. 안동에서 부종대 신발하면 전국에서도 꼽히는 매출을 올려 그 당시 본사에 뽑혀 서울 견학을 다녀왔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 청와대 구경을 시켜 주면서 간첩 김신조가 저기 뒷산으로 넘어 왔다며 손가락으로 침투 선을 가리켰다. 그런 시절의 장사였다.
안동은 특히 학교가 많아 학생들 신발을 엄청나게 팔았다. 신발이 모자라 다른 지역의 대리점들을 돌아가며 그곳에서 못 파는 물건들을 더 받아왔다. 전라도고 강원도고 모조리 다녔다. 그래도 모자라는 신발은 서울 도매시장에 가서 또 떼어왔다. 안동에서 도소매를 같이 할 정도로 가게는 번창했다.
그러던 중 또 한 번 자리를 옮기는 일이 생겼다. 현재의 위치인 이곳으로 옮길 때 이곳의 상권 또한 요지였다. 옥동을 개발하기 전인 1986년 이 자리는 공시지가가 가장 높은 곳이었다. 신시장 네거리는 그 당시 상권이 활황이던 자리였으나 지금은 변화에 못 이겨 한적한 곳으로 바뀌었다.
▲ 뱅가드 신발 내부 ⓒ강수완
그러나 아직도 찾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값이 헐하고 신발이 좋아 잠깐 앉아있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손님이 들고 났다. 꽃 무늬 장화가 가지런한 진열대와 멋쟁이 구두 판매대 앞에서 나이 든 사장은 아직도 수건을 들고 다니며 먼지를 닦아냈다. 상품은 깔끔하나 가게 안의 비품은 어쩔 수 없이 세월의 무게가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35년 째 자리 잡고 장사하고 있다니 의자고 계산대고 같이 나이를 먹고 있었다.
안주인이 먼저 가신지 십 여 년이 넘었다며 같이 장사하던 시절에 비해 지금은 그저 찾아오는 단골들 때문에 문을 열고 소일하고 있으나 많이 적적하다고 했다. 사람 하나의 그늘이 큰 까닭에 안주인이 관리 하던 손님들과는 자연히 차츰 어색해진 경우도 더러 있었다. 빈자리가 손님까지 움직인다는 말이 서글펐으나 그리움에 비하면 덜해진 장사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인명이 재천이라지만 원래 성직자였던 안사람과 혼인에 이르러 조근조근한 삶을 잘 살았다며 지그시 감는 눈자위가 얼핏 젖어 보였다.
처음 장사를 시작하여 활황일 때 안동의 신발점 두 세곳이 부도로 거덜 났을 때도 직원관리와 판매관리를 겸하는 중간관리를 철저히 하여 살아남아 지금에 이른 것처럼, 인생은 다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꾸려가면 된다고 믿었다. 같이 시작했던 사촌형님도 아직 정정하게 계신다며 말 중간 중간에 옛날을 생각하는지 “하이고, 하이고” 짧고 담담한 어투의 회한인지 탄식인지를 자주 뱉었다.
슬하에 3남매를 두었다. 혼자 가게 보기가 힘들어 몇 년 째 직원을 하나 두고 있다. 며칠 전 그 직원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 중이라 요새는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다. 농번기부터 이맘때 까지는 여름 장사가 잘되는 법이라 요즘은 일요일도 문을 열고 있다. 떼돈을 번다기보다 쉬는 날 찾아오는 손님이 발길을 돌리는 일이 미안해서이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공식적인 휴무일은 없다. 오전 9시에 출근하여 저녁 9시에 퇴근하는 일이 아직은 견딜만하다. 장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는 이제 시간을 삐친다는 말을 하는데, 메이커 신발을 찾아 백화점을 다니는 손님 이외에도 각자의 시간으로 시장 신발점에 신발을 사러 오는 사람들의 하루 또한 아름답게 그려졌다.
▲ 뱅가드 신발 사장님 (ⓒ강수완)
며느리가 여름 새 구두 한 켤레 사라며 돈을 보내줘 찾아왔다는 흰 머리 할매 손님이 들어오자 가게 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반짝이 보석이 박힌 흰 구두를 권하자 마음에 들어 하며 쉽게 샀다. 끝 단위를 깎아 주며 주인과 손님이 함께 웃었다. 나도 꽃무늬 요란한 슬리퍼를 두 켤레 샀다. 한옥 마루 밑에 놓고 봉숭아꽃을 보러 마당으로 내려가거나, 수돗가에 손 씻으러 갈 때 신으면 날아갈 듯 예쁘게 생겨 흔쾌히 샀다. 깨끗하게 진열되어 있던 거였으나 건네주면서 또 한 번 먼지를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