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창고

경북기록문화연구원

더불어 사는 삶의 힘
오늘의 기록은 내일의 역사

스토리 아카이브

홈으로 > 스토리 아카이브 > 기록창고
기록창고

근현대의 기억- 아버지와 조약돌

  • 조창희(목사)
  • 2021-08-26 오후 3:20:30
  • 1,709

아버지와 조약돌

 

▲1961년 10월, 안동 목성동 집 앞에서 우리 가족.            

왼쪽 첫 번째가 필자            

그 옆이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 (ⓒ조창희)            

 

38선 북쪽 강원도 이천군이 고향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인 개화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보통학교와 춘천농고를 졸업하시고 서울에 유학하여 감리교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신학교가 폐교되어 학업을 중단하셨다. 이후 철원금융조합에 취업을 하였다.

어머니는 평양정의여고를 졸업한 후 일본 고베시에 있는 성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덕적도 어업 협동조합에 취업했다가 함경도 청진 장로교회 유치원 보모로 일하셨다. 두 분은 1942년 4월 6일 결혼하여 1944년 3월 27일 첫 딸을 낳고 12월 5일에 철원에서 경북 안동으로 이주하였다.

이때에 만일 직장의 상관인 일본인 금융조합장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안동에 갈 생각 말고 철원에서 계속 살라고 했으면 어쩔 수 없이 철원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사의 자유도 없었고 직장을 마음대로 옮길 자유도 없었던, 일제의 강압이 극으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또한 철원에 계속 있었으면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가는 20대의 젊은 나이였기에 실상은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부모님은 안동으로 이주해 왔던 것이다.

안동에는 필자의 고모부가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외과 의사로 근무하던 중 스카웃 되어 안동 성소병원 부원장이 되어 실질적인 원장의 직무를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까지 폐지시키므로 안동 백태성 병원을 개업하여 개인 병원을 차렸기에 철원 금융조합 업무를 보고 있는 처남인 아버지를 안동에 오게 해서 안동 백병원 서무과장으로 병원 살림살이를 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병원이 호황을 누리던 황금기였기에 철원금융조합에서는 이사 대우 직급으로 60원의 월급을 받았는데 안동 백병원 서무과장 월급은 갑절되는 120원이었으니 생활도 여유로운 편이었다.

1945년 연초에 안동농고생들과 졸업생들이 중심이 된 안동에서 일어난 저항운동과 독립운동이 발각되어 주동자들과 수십 명의 조직 회원들이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하며 순절하는 이까지 나왔다. 독립운동단체는 조선회복연구단이었다. 여기 연루된 이주헌 선생은 안동 백병원 방사선실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근무할 때에는 평범한 보통사람 인데 실상은 조선회복연구단의 주동 멤버 중 한 사람이요 이와는 별도로 개인적으로 독립운동 지망생들을 규합하여 백병원 방사선실에서 수시로 비밀 결사대로 모이기도 했다. 이를 눈치 챈 백태성 원장은 이주헌 선생을 격려하며 물심양면으로 크게 협조하였다. 조선회복연구단이 발각되자 1945년 2월 이주헌 선생도 구금되어 조사를 받고 안동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다행스런 일은 이주헌 선생이 안동 백병원에서 극비리에 진행한 독립운동은 발각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런 연유로 공석이 된 백병원 방사선실 과장 자리는 아버지가 임시로 겸임하게 되었다. 한편 안동에서는 조선인들의 저항 운동을 차단하 기 위하여 일본군 병력을 급히 안동에 진주시켜 안동 교회를 징발하여 교회 건물과 앞마당에 군용 천막을 치고 막사로 삼고 군수물자와 장비를 쌓아 놓았다. 김광현 목사는 안동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안동교회는 일본군 임시 사령부로 징발되었으니 주일예배는 교회에서 못 드리고 서당골 뒷산에 있는 선교사들이 추방당하여 비어있는 사택에서 20~30명 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눈물로 예배를 드린 사실을 아버지는 자주 들려주셨다.

필자의 아버지는 8.15 광복 후 안동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았고 주일학교 유년부장이 되어 어린이 교육의 선봉에 섰다. 초기에는 몇 명 되지 않던 어린이들이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5년 동안에 998명까지 늘었다. 유년부장인 조상국 집사와 주일학교 교사들은 “다음 주일에는 1천명 돌파하자.”고 하면서 열심을 다 했는데 다음 주일이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터진 날로 인원파악도 못 하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모든 부모들과 사태를 관망하고 피난을 가야했으니 얼마나 얄궂은 운명인가?

아버지는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예찬에 깊이 감동되어 아동문학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기독교서회에 서는 6.25 전쟁 중인데도 어린이들을 위한 월간 잡지 『새 벗』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51년도에는 안동에 제일 감리교회가 세워져서 감리교회로 옮긴 후 52년도에 장로가 되어 더욱 왕성하게 아동문학가로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8.15 광복 후 초기에는 ‘조약돌’이라는 필명으로 『기독교 가정생활』 , 『새 벗』 등에 발표했고 장로가 된 후에는 『감리교 장로회보』, 『크리스마스 자료 집』, 『주일학교 절기 자료집』 등에 동요, 동시, 동화, 동극 등을 발표하였고 훗날에는 동화집과 동시집도 출간하였으며 동수필 작품도 발표하였다.

안동에서 아동문학가로 왕성한 활동을 할 때에 북에서 남쪽으로 피난 온 박화목 선생이 안동을 거쳐 가면서 반갑게 만났다. 박화목 선생의 대표 작품은 동요 <과수원길>과 가극으로 <보리밭>이 있다. 그리고 안동교회를 통해서 일직면이 고향인 안동여고생과 우정을 쌓았는데 사랑으로 승화하여 일직면이 처가 동네가 되었다. 또한 대표 작품으로 <목장길 따라>를 남겨 놓은 석용원 선생은 영주가 고향인데 형님 되는 석호인 목사가 안동에 있을 때 자주 안동에 와서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 아동 심리학 교수로 퇴직 후에는 명예교수가 된 김재은 박사도 안동교회에서 만났고 육군군종감을 역임하신 문은식 목사도 안동교회에서 만났다. 아버지의 대표 작품으로는 유치원 어린이들의 노래로 <볼우물>이 있고 어린이 찬송가와 21세기 찬송가 작사 공모에 당선된 찬송시가 있다.

 

조약돌이라는 필명

아버지는 초기에 조상국 본명보다도 ‘조약돌’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현재 소중한 유품으로 남겨 놓으신 메모 수첩이 있는데 1948년도와 49년도에 만들어 쓰신 메모 수첩이다. 1947년 3월에 필자가 태어났으니 아들 뒀다고 좋아하시며 지으신 동시도 있고 조약돌 동시도 있다.

또한 『새 벗』 잡지에도 조약돌 필명으로 동시를 발표하였고 크리스마스 자료집에도 조약돌 필명으로 동극 발표를 하였다. 모두 1953년도 전후 발표한 작품이다. 안동을 끼고 흘러가는 낙동강 모래사장 곁에 동글 동글하고 매끈한 조약돌이야말로 아이들의 놀잇감이 되고 또한 성경에 나오는 목동 소년 다윗이 조약돌팔매로 적군 골리앗 장수와 싸워서 이긴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꿈을 심어준다.

그런데 50년대 말 60년대에 접어들 때에 인기 있는 대중잡지인 월간 여원지에 시인 지망생이 조약돌 이라는 필명으로 시 한 편을 투고하여 실린 것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한편으로는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10년간 조약돌 아동문학가로 활동해 왔는데 제 2의 조약돌로 시인 지망생이 나타났으니 서운한 마음도 있어서 한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마음을 비우고 조약돌 예명을 양보하고 조상국 본명으로 되돌아가서 새출발하자 하고 그런 마음을 적어서 『여원』 잡지에 실린 조약돌 시인 지망생 주소로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시인으로 대성하라고 권면했다. 그런데 이후에 가타부타 답장도 없었고 서신이 되돌아오지도 않았고 당대에 인기가 있었던 『아리랑』, 『명랑』, 『여원』, 『학원』 등 각종 월간지에 조약돌로 발표되는 시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문단에서 조약돌 시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조상국 본명으로 새출발한 아버지만이 한국 아동문학계에 이름을 남겼다.

 

안동 목성동 64번지 가나다 상점

현재 안동시청 자리는 과거에 안동사범학교 자리였다. 6.25 전쟁이 정전된 50년대 중반까지 안동사범 학교와 병설중학교가 있었고 50년대 후반에는 부속 국민학교까지 있었다. 그런데 교육법이 개정되어 사범학교가 폐교되고 2년제 교육 초급대학이 신설되어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길이 2년 연장된 셈이다. 시청 자리에 사범학교가 있던 그 옛날 공부하고 살아가던 안동의 올드맨들은 안동의 신시장을 가는 초입구에 있는 목성동 64번지의 가나다 상점을 기억하고 있다. 주로 사범학교 학생들이 단골로 널리 이용한 문방구점이었다.

 ▲목성동 64번지 가나다 상점 앞에서 남매 (ⓒ조창희)                               

 

가게 이름을 가나다 상점이라고 한 것은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예찬론에 감동이 되신 아버지는 아동문학가의 길을 가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가나다라마바… 한글을 널리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동에 정착한 후 아버지는 백병원에 근무하였고 목성동 64번지 집에는 가나다 상점을 차려서 어머니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등 온 가족이 부업으로 삼았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후 3월 1일부터 봄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나 예전에는 4월 1일부터 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때 해마다 4월이면 학교 선생님들을 대거 집으로 초대하여 하루 저녁 식사를 융숭하게 대접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6.25 전쟁으로 안동 시가지가 파괴되고 잿더미가 되었을 때 백태성 박사는 파괴된 백병원을 복구하지 않고 안동도립병원 원장으로 안주하므로 필자의 아버지도 백병원 서무과 장과 방사선실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을 이력으로 인정받아서 안동도립병원 방사선실 과장으로 취업했다.

안동사범학교가 폐교되니 병설중학교와 부속국민학교도 폐교되고 목성동 가나다 상점 문방구도 사양길에 접어들어서 문방구점과 함께 중고 서점으로 변신했고 63년도에는 찐빵가게로 변신했다가 우리 가족은 대전으로 이주했다. 지금 목성동 64번지에는 4층 건물이 들어섰고 화장품 가게와 피아노 가게로 상권을 잇고 있다.

 

사진작가 조상국 장로

강원도 이천군 고향땅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춘천에 유학하여 춘천농고생으로 공부하던 고교시절에 일본인 담임선생님이 카메라 사진 촬영에 재미를 붙였다. 선생님은 자신이 담당한 학생들 중 아버지를 좋게 보았는지 만만하게 보았는지 주말이거나 사진 촬영하러 갈 때에 “상국아, 선생님하고 사진 찍으러 가자.”하고 늘 데리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가자고 하니 안 갈수도 없고 거역할 수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고교생 시절에 카메라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카메라가 드물던 예전에 각종 행사 때마다 기록 사진을 찍었고 아들인 필자가 대를 이어서 아동문학가가 되었고 사진작가가 되어서 주옥같은 작품을 간직 하고 있다. 6.25 전쟁 후 대구에서 창간한 일간 신문사에서 거액의 상금을 걸고 사진 작품 콘테스트를 열었다. 아버지는 오리들이 낙동강변 모래자갈 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면을 포착하여 사진 작품으로 신문사에 응모하였다. 심사결과를 발표하기 며칠 전 신문사의 담당자가 비포장도로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대구에서 안동까지 와 아버지를 만나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내용은 조상국 선생의 작품이 월등히 우수하여 1.2.3등의 등수를 부여하는 것이 작가에게 결례가 될 것 같아서 특별상을 신설해서 특별상 작품으로 배려하려고 하니 조상국 선생께서 허락을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순진하게도 좋게 생각하고 수용했다. 그런데 시상식 때 대구에 교통비 들여서 가보니 특별상 상장만 한 장 있고 특별상에 대한 예우와 부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면에 작품 수준이 낮은 대구 사람들의 작품으로 1.2.3등에 오른 이들에게는 종이로 만든 상장 외에 부상으로 거액의 상금과 꽃다발까지 안겨 주었으니 아버지는 특별상장 한 장 받은 것으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 작품이 몇 장 있다. 6.25 전쟁 때 파괴된 안동도립병원을 복구하여 전체 직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록사진과 법흥교를 복구할 때에 임시 교통수단으로 나룻배를 띄워서 용상동 마뜰을 오고 가게 한 사진은 안동의 역사적인 사진으로 남아있다.

또한 8.15 광복 직후 경로 주일에 안동교회 할아버지, 할머니 어르신들의 단체사진은 안동교회의 역사적인 사진이 되었다. 이 사진 속에는 필자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계신다. 그 외에 안동에 최초로 세워진 안동제일감리교회의 초기 사진은 수도 없이 많이 찍어서 남겨 놓으셨다. 따라서 목성동 64번지 집에서 부업으로 경영한 가나다 상점 문방구 가게에서는 사진 D.P점까지 겸하여 했었다. 아동문학가와 사진작가로 한평생 활동하신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아들인 필자도 아동문학가가 되었고 사진작가가 되어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제 70대 중반이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고향 땅 안동에서 변함없이 아동문학가와 사진작가로 살다가 하늘나라에 갈 것이다.

조창희(목사)
2021-08-26 오후 3:20:30
210.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