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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우야든동 산다”-미술선생님 김수진의 인생스케치

  • 백소애(기록창고 편집인)
  • 2021-08-26 오전 11:53:25
  • 1,858

 

 

미술선생님 김수진의 인생스케치

 

 ▲김수진 씨(ⓒ백소애)                   

 

회곡으로 간다. 7월의 풍산 들녘은 눈이 시릴만큼 푸르렀고 자전거를 탄 촌로가 느리게 가는 풍경은 그림과 같았다. 그런 그림을 그리며 한적하게 지내고 싶어 귀향한 전직 미술 선생님 김수진 씨는 지금의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가 자리 잡을 수 있게 힘을 보탠 분이다. 미술 선생님에서 하회가면극연구회 회장 그리고 로타리 회장도 한 사업가로, 그렇지만 종래에는 그림 그리고 글씨 쓰는 ‘김수진’으로 남고 싶은, 41년생 김수진 씨의 인생 스케치를 감상해본다.

 

엄했던 훈장 할아버지, 나를 바위에 팔아버렸지

내 고향은 안동 시내 천리동. 안동초등학교 바로 앞, 그러니까 남문동하고 바로 붙은 곳이지. 내가 우리 5남매 중에 맏이래요. 우리 할아버지는 낙동강 건너 영호루 바로 밑에 정하동, 거기 계셨어요. 내 어릴 때 기억으로 요새 생각하니까 아마 대여섯살 됐을 거야. 유치원이 그땐 없었으니까. 할아버지가 그 동네 서당 훈장이랬어. 여기 시내에 있으면서 할아버지 한테 매일 아침에 글 배우러 갔던 기억이 있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안 가면 안되는 걸로 기억을 해요. 언젠가 그해 안동에 수해가 나 낙동강이 범람할 정도였는데 그날 다리에 물이 찰랑찰랑거리는데도 안동교 난간을 붙들고 할아버지한테 공부하러 간 기억이 나. 아마 할아버지가 그 정도로 상당히 엄했던 거 같애.

집에 어른은 젊었을 때 그러니까 해방 전에는 우체부였어. 우체부는 그때는 전부 한문을 썼을 때니까 글을 알아야 했거든. 글을 잘해야 되니까 아버지가 우체부가 된 거야. 나중에 해방되고는 안동시에서 그 때는 안동읍이랬지? 천리동, 동장으로 동무를 하여튼 몇십 년을 봤어요. 내 이름을 한자로 쓰면 목숨 수壽에 진압할 진鎭, 목 숨을 억누른다, 진압한다는 뜻이에요. 목숨을 마음대로 한다는 건데, 아마 내가 보기에는 할아버지가 내 위에 손자를 그러니까, 내 형되는 사람을 아마 잃어버 려서 강한 이름을 지었다카고 추측할 뿐이지. 그래선가 요즘은 그런 미신이 없지만 옛날에는 낙동강 건너가는데 영호루 절벽 밑에 큰 바위가 있었어 요, 강가에. 내 어릴 때 들은 이야긴데, 나를 그 바위에 팔았다 카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 말하자면 좀 천하게 키운다고. 위에 형을 없앴으니까 그런 얘기가 있었지요.

 

우리 농림학교 동기들이 좀 날렸었지

안동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안동초등학교지만 옛날 엔 중앙국민학교랬어요, 거길 나왔고 안동중학교 그 다음에 안동농림 나왔지. 우리가 농림학교 다닐때 는… 경상북도 내에서도 알아주는 대단한 학교랬어요. 1950년대에는 우리 동기들이 안동 전체를 주름잡고 있었지. 그땐 고등학교 나온 사람이 별로 없었어. 안동에서도 우리 들어갈 때만 해도 비율이 5대 1이랬어. 지금은 안동고등학교가 잘 나가지만 당시 안동고등학교는 초창기 생길 때였어. 하여튼 농림학교는 그때는 졸업식날 경상북도내 기관장들이 졸업생들을 데리러 왔어. 취업 시킬라꼬.
좀 건방스런 얘기지만 난 졸업식날 교장이 “학교에서 추천해 줄 챔이니까 서울대 농대를 무시험으로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했어. 학교장 추천으로 서울대 농대에 가라 한 거야. 그런데 집에 어른이 상당히 그때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귀가 밝아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나라 는 뭐니뭐니해도 농업 국가긴 해도 농사만 지어 갖고는 안된다, 이러셨어. 그때 우리 동기들은 요새 말하면 농촌지도소라든지 농협이라든지 저절로 다 들어 갔지만 난 그대로 지원해서 군대 갔지.

스무 살 교육생도 당시 박 대통령 캐치플레이즈가 군에 안 갔다오면 사회생활 못한다 할 정도랬어요. 그만큼 아주 전제가 군대랬어. 그래서 내가 속으로 ‘내 같은 사람이 신체도 약하고 사회생활이고 뭐라도 하려면 군부터 댕겨 와야겠다’ 싶어서 군대에 지원했지. 지원해서 가보이 그때까지 자유당 시절에 빽 좋고 돈 써가지고 빠지고 빠지고 하다가 나이가 서른 살 넘은 사람이 전부 우르르 군에 왔어. 우리 소대 60명대원 중에서 내가 제일 어린 거야. 지원해서 갔으니 내 나이 열아홉이나 스물이었지. 그 와중에 내가 그 훈련소 소대 안에 교육을 받아야 하니까, 요새 말하면 ‘총무’택이지 교육받는 모든 걸 준비하고 관리하는 교육생도를 내가 하겠다고 자원을 했어. 소대장이 딱 보니 나이도 제일 어리고 피하고 피해서 군에 온 사람보다는 자발적으로 오고 또 그래도 제일 현대식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니까 싶었는지 시키더라고.

사실 내가 그 교육생도를 한 게 첨에는 내 적성에 안 맞는다 생각해서 교육을 안 받을라고 내딴에는 꼼수를 쓴 거였어. 근데 하다 보니까 야 이래할 게 아니라 어차피 여기 교육기간 동안에 졸업을 할건데 이왕 할라면 올케 하자 싶었어. 그때 9주 교육을 받는데 6주는 허송세월 보냈지만 졸업 때는 그 훈련소 안에서 1등이 됐지. 최우수 교육생이 되니까 뭔 특혜를 주냐면은 자기가 원하는 부대로 배속을 시켜줘. 근데 배속 시켜줘도 내가 아무런 지식이 없는데 어디가 좋은지 나쁜지 몰라. 그래서 조교들한테 어디가 제일 후방이냐 물으니 그때 당시에 배속신청이 왔는 것 중에 는 21사단이 제일 후방이라는거야. 그래서 난 제일 후방으로 가겠다 해서 21사단으로 가서 거기서 제대를 했어.

 

▲젊은 날의 김수진 씨(ⓒ김수진)  

제대복 입고 첫 출근한 미술 선생님

군대 생활 3년 6개월 마치고 제대했지. 그때 안동에 여학교로는 안동여고가 있고 여상은 그때 없었어. 그때 처음으로 경안여상이 새로 학생을 모집하면서 생겼어. 내가 제대하고 집에 오니까 어예 소문을 들 었는지 경안여상에서 집으로 찾아왔어. 와서 학교에 나와달라 이캐. 군대에 갓 갔다 오니 옷이 없어 사회복이. 그래서 제대복 입고 여상학교 개교했는데 거기에 선생으로 첫 출근을 했는거야.

그때 사회구조로 봐서는 내 나름대로 실력은 있었지. 내가 농림학교 3학년 될 때, 농림학교는 실업학교잖아. 실업학교니까 예능계 선생이 잘 없어요. 관악대 악기 하는 음악선생은 있어도 미술선생이 없는 거야. 내가 미술을 공부했기 때문에 고등학교에 있으면서 시간표 상으로는 미술시간이 일주일에 한 시간 있으면 선생이 없으니 내가 아-들 데리고 가서 야외서 스케치하고 그리는 거 보고 그랬어. 일반 학교 같으면 초등학교 모양으로 음악선생도 하고 미술선생도 하고 수업도 하고 이러듯이 그런데 여기는 실업학교라 그런 것도 없었고……. 내가 가히 미술선생 하다시피 했어. 그러다 보이 그게 소문이 났는지 제대 하고 오이께네 학교에서 미술선생으로 와달라고 했는거야. 그때부터 여상에 근무하게 됐지. 여상 창립 멤바야. 26년간 근무했으니 오래 했지. 그러다 경안여중이 생기고. 옛날에 한국벨트공장 있는데 저기 안막동 올라가는데 거기 있었거든. 경안여상하고 여중이 같이 있었어. 여상이 실업학교니까 미술이라 케도, 서예하고 이런 걸 가르쳤어. 나중에 야들이 전부 다 직장인이 돼야 하니까 실제로 도움 되는 걸로 가르쳤지.

그 때는 여상 나오면 거의 취직 다 됐어요. 걔들이 은행으로 취업 거의 다 했고 내가 이래… 세월 지나고 보니까 그때 애들이 참 실력이 좋았어. 그때는 여상 나온 애들은 가정형편 어려운 애들이 학교는 가야 되는데 그때는 인문학교뿐이랬으니까. 걔들이 그것 때문 에 학교를 못가고 집에 있던 애들이 있었는데, 내가 가니께네 내보다가 한 살 적은 애들도 신입생으로 들어온 거야. 그때는 거의 나이 차이가 없어. 걔들이 밖에서 사회생활 하다가 학교에 왔으니. 졸업한 후에도 몇 년이 지나도 그 사제간에 정이라할까, 요즘 보면 스승이 없다 그러잖애.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고. 근데 그때는 진짜 선생이라 카면은 학생들이 그 만큼 존경하고 예도 갖출 줄 알고 학교 수업하는 것도 착실하게 잘 했는 거 같애.

 

별명은 ‘미술’

난 수채화 전공이야. 인물화를 즐겨 그렸지. 경북 미술대전 처음 시작할 때 첫해에 수채화로 전지를 작품을 냈는데 특선을 했어. 그르이께네 이것도 할만하구나 했어. 사실은 수채화로 인물 한다는 거는 솔직하게 말해서 실력 없으면 못해. 그걸 인물로 내서 특선을 했어. 인물을 그린다는 것은 스케치할 때부터 데상 실력이 없으면 안 되거든. 대회 어디 출품하는데 인물화를 낸다는 것은,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는 요새는 워낙 세분화 됐지만 그때는 그만큼 자기 실력을 과시하는 거야. 능력을. 갓 제대한 총각 선생이라 사실 인기도 있었지. 인기는 있는 대신에 내가 말하자면 안동사람이래가지고 거기다가 안동김가이니까네 거의 원칙주의자니까, 학교서 학생들 중에서는 딱 소문 났는게 저 선생은 고마 한번 걸렸다카면은 끝난다. 이래 소문이 났어.

나는 별명이 지금도 그걸 쓰고 있는데 ‘미술’이라. 과목이 별명이 된 거야. 당시 나도 제대하고 나서 바로 학교에 갔으니 고등학교 선생 자격이 없었어. 여상에 가서 그때부터 내대로 공부해서 검정고시 모양으로 교사자격증 시험을 쳐서 미술교사 자격증을 딴 거야. 사범대학은 안나왔지만 사범대학에 준하는 교사자격증을 딴 거지. 방과 후 스승님과 함께 했던 스케치 시간 중학교 다닐 때부터 그림을 그렸지.

안동중학교에 와있는 미술선생이 박기태 선생이라고… 지금은 작고하고 없지만, 아주 유명한 선생이었어. 그때 당시엔 유명한 줄 몰랐어. 근데 안동대학에 미대 교수인데 이수창 교수하고 김인수 교수 그렇게 서이가 한 학교 출신이라. 이 사람들이 다 실력가라. 그때 박기태 선생이 날 보고 니가 재능이 있으니까 그림을 그려라, 이래. 그분들은 학교 수업만 마치만 캔버스 미고 야외 나가 스케치하고 이런 스타일이야. 그 서이가 전부 다. 그때마다 나를 꼭 같이 데리고 다녔어. 그르이 거기 옆에서 그리는거 나도 똑같이 그리는 방법을 배웠으니 내대로는 학생으로는 상당히 실력을 인정 받았지. 나중에 “야, 너거 전시회 한번 해라” 이래. 그래서 조광래라고 1년 선배 거하고 둘이서 2인전을 열었어. 군청 앞 가로수에 액자를 걸어서 연 첫 전시회 지금은 많이 변했지. 옛날 군청자리… 지금 웅부공원 앞에서 전시를 했어. 요즘 모양 전시장 장소가 별로 없었어. 6.25사변 일어나고 난 다음에 우리나라 복구상황이 좋지 않았어. 길거리 가로수 나무에다가 액자만 만들어 걸어 갖고 둘이서 전시회를 했어.

그래놔놓으니 말하자면 소문이 막 났어. 학생으로서 전시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 요새하고 달라서. 선생님들이 “너-는 재능이 이만하면 안되겠다 유학을 가라” 캐. 서양화 중에서도 나는 전공이 수채화지. 유학 갈라니까 그때 어려운 형편에 돈이 없으니까 유학 가자고 돈 모으려고 사실 전시회 한 거야. 그림 팔아서 유학 가자고. 같이 전시한 조광래, 거는 공립학교 가서 나중에 사범학교 나와서 교감, 교장까지 했을 걸… 난 그 후에 헤어져서 잘 모르는데. 그래서 전시회를 했지만 사실은 그게 연고도 없는데 유학 간다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그때는 여권을 만들어서 정식으로 유학을 가고 그런 것도 몰랬어. 무작정 포부만 가지고 있었지. 둘이서 “야, 그림 팔아서 돈 되는대로 안되면 일본 으로 밀선 타고 가자” 그래서 했는데 사실은 그 돈이 밀선 타고 갈 만한 경비도 안 나오는 거야. 팔리긴 팔 렸지. 그때 돈으로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 한점에 3천 원인가에 팔았어. 그때 돈으로 3천 원이니까 한 30만 원 돈 아닐까 싶어. 그때는 그걸 넝큼 사기가 힘들었지. 그림은 팔았지만 결국은 경비가 모자라서 그것도 포기하고. 그러고 안되니까 내가 군대 가버린 거지.

 

▲1972년 경안여중 제자들과 (ⓒ김수진)              

 

미술, 서예•전각•조각까지 다 해야 하는 마술

경안고등학교에 김인환 교장이라고 유명한 분이 있어. 학교 재단에 장로랬거든. 그 양반이 인재를 구하려면 미술선생 구하려면 김수진이를 부르라고 아마 이야기를 해줬나봐 내 추측인데. 왜냐면 그 후에 도 그 김인한 교장이 특별한 관심을 내한테 가졌었어. 경안재단의 미국 선교사 반피득 박사가 있어. 그때는 안동대학도 설립 전이었을거야 아마. 그때 미술한다카면 그림만 하는 게 아니고 조각, 판화 뭐 이런 것도 다 해야하는 만능이래야 실력을 인정 받았거든. 그런데 김인한 교장이 날 보고 반피득 박사 동상을 세우고 싶다 그래. 그땐 다른 사람 조각하는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내가 그것도 해보겠다 했지. 진흙 점토로 흉상 다 만들어서 석고로 틀을 만든거야. 그 틀만 가지고 서울에 올라갔어. 용산쪽에 가니께네 주물만 만드는 데가 있더라고. 물어서 가서 거기서 틀에 부어가 만든 거야. 그래서 청동으로 흉상을 만든 거지. 그게 경안고등학교에 안죽도 있는지는 나도 잘 몰라.

더군다나 내가 그때 당시에 서양미술사 있잖아. 서양미술사 책을 만들었다니까. 교재가 없으니까 자료 수집해서 책자를 이만하게 만들어서 내가 수업자료 를 만들었어. 그때 6.25사변 나고 폐허되고 그랬는데 무슨 책이 있었겠어. 나중에 내가 결혼을 할때 김인한 교장이 “니 결혼 식에는 내가 주례를 해야한다” 카면서 결혼할 때 주례까지 했지.

내가 이제 말하자면 미술 선생이니까 아무래도 시간이 많잖아. 다른 선생하고는 다르고. 그때 당시에는 학교에서 무슨 행사한다 플랑카드 만들고 이러면 전부 내가 다 썼어. 환경미화도 그런 것도 전부 다. 학교에서도 나는 딱 인정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깐에 학교 수업에만 지장 없으면은 지가 나가 있던지 어데 있던지 별 간섭을 안 했어요. 사실 내가 어느 면으로 보만 특혜를 받은 셈이지.

 

하회별신굿과의 인연

내가 여상에 있을 때 문화원 출입을 많이 할 때였어. 그때 문화원장이 류한상 씨였어. 류한상 씨하고 내하고는 아주 인연이 각별하게 좋았어. 류한상 씨가 젊은 사람으로는 내한테 굉장히 매력을 가지고 있었나봐. 왜 그런고 하면 류한상 씨가 문화원에 있음서 사군자를 했어. 내가 그때 조각도 했을 때니까 류한상 씨한테 선물을 했지. 저 암산에 가면 절벽 밑에 물속에 잠겨져 있는 돌귀가 있어. 그 물속에 묻혀있는 그 돌귀를 뭐라고 하냐면 마간석, 이라고 해서 말의 간의 색깔, 붉은 돌이지. 그게 암산 수중석이라. 물속에 잠긴 마간석! 이 돌귀가 뭐하는데 좋냐면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이 마간석이 다른덴 없는데 이걸로 벼루를 만들면 서예하는데 그리 좋아. 그걸로 벼루를 만들면 붓글씨 쓰는 사람들한테는 최고지. 그분이 거기서 다른 사람들 사군자 지도하고 가르쳐주는데 내가 이래 가보니 이 양반한테 특별한 벼루를 만들어 선물해야겠다, 싶었지. 그르이 이 양반이 나를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지. 서예하는 사람한테 제일 큰 선물이 그거잖아. 그리고 나도 거기 자주 출입 하니 서예를 좋아하고 나도 사군자하고 하고.

사실 난 사군자를 특별히 배운 것도 없어요. 그냥 중국의 유명한 사군자 책 중에 ‘계자원’하는 책이 있는데 그걸 보면서 독학했어. 뭐든지 나는 독학이니까. 수채화가 전공이잖아. 사군자도 벼루에 물을 갈아서 하는 거잖아. 물의 농담으로 하는 거니까 수채화랑 거의 비슷해. 수채화는 색깔이 있다뿐이고 이건 색깔이 없는 거니까.

그때 당시에 내대로는 사실은 남한테 이야기 안해도 자만한 게 ‘내가 뭐 할라 그래 가지고 안되는 게 없다’ 이런 마음가짐이었어요. 한 번 해보면 되지 뭐 싶었어. 1년 동안 내 혼자서 집에서 연습한 거야. 연습해서 어느 정도 됐다 싶으니께네 그럼 내가 인증을 한번 받아봐야겠다 싶어서 한국 미술대전 공모전에 사군자를 냈어. 첫해 냈는데 바로 입선이라, 그래서 속으로 자신만만해했지, 하하.

내가 문화원에 다닐 때 보니 영남대학교 김택규 교수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류한상 씨 찾아와가지고 하회탈춤에 대한 걸 이야기 하고 있더라고. 내가 옆에서 들어보니깐 아, 저거 그라마 공연을 해야하는데, 그때 하마 일제시대에 끊겨져가지고 한 몇십 년 동안을 한 번도 한 일도 없다캐. 그라마 류한상 씨가 마침, 가톨릭교인이잖아요. 역전에 안동문화회관 무대가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안동문화원에서 하다가 거긴 좁으니까 나중에 무대를 옮겨가지고 문화회관에서 류한상 씨의 코치를 받아서 했지. 학교 선생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춤을 추는 게 아니고 류한상 씨가 날 보고 운영을 해봤으면 좋겠다, 이래. 연구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다가 탈놀이회 회장을 맡아가지고 한게 한 10년 했어요.

그래 탈놀이회를 맨들어 가지고 회원들도 끌어모았어. 근데 거기 들어가는 경비가 들어가잖아, 여러 사람을 모을라카면 하다못해 간식이든 뭐든 돈이 필요하잖아. 그때 만문한게, 나는 그래도 학교 있으니까 월급 받으니까 내 사비로 근근이 이어나갔지.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아, 이거는 막연하게 이래 해가 될 일이 아니다 이걸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든지 해서 인정을 받아야겠다 싶었어. 그때 전국민속경연대회 있잖아, 경상북도대표팀으로 해서 민속경연대회에 그때 나가게 된거야. 그래서 내가 회원들한테 용기를 준 게 “여기 나가서 입상하면은 그때부터 국가에서 관심을 가지고 운영하는 경비도 나올 수 있으니까 잘해 보자. 고생하더래도 여기서 이 물고 누말따나 허리띠 졸라가면서 해보자” 이래 다짐을 해가면서 나갔는데 거기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은 거야. 그때 장관상을 받은 후부터 이 탈춤 자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된 거야. 그래 되니까 시에서도 경비를 지원하고, 예산을 지원해주려고 해도 그전에는 아무 근거가 없었는데 이게 되니깐 그때부터 시청 공보실에서 관심을 갖는거야.

그때 안동대학교 성병희 교수라고 있었어. 그 양반이 국문학과 교수랬어. 그냥은 안되고 내보낼라면은 원래 탈춤을 했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어야 한 다. 뿌리를 찾으려면은 그래야 근거가 되니까. 그래서 내가 발굴해낸 게 이창희 씨라. 사실은 내가 그때는 내 욕심이랬지만은 민속경연대회에 내보래려면 이창희 씨가 없으면 인정을 못 받는 거야. 명분이 안 서지. 이창희 씨가 그때 어릴 때였지. 이창희 씨가 키가 쪼맨해요. 체구도 적어요. 그래 무동 태우기 좋다. 그러면서 무동을 타서 공연에 참가를 했던 거야. 열심히 자료를 맨들어가지고 문화공고부에 올린거지. 그래가지고 이창희 씨를 인간문화재 맨들면서 탈놀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된 거야. 그때 염순규 씨라고 있었는데 한 1년쯤 회장을 했어. 그다음부터는 내가 했고. 나는 누말따나 이제는 시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탈놀이회 사람들은 놀이꾼으로 등록되면 적은 돈이지만 경비가 나오니까 그걸 경비로 쓰고 나는 내가 안동사람으로서 요걸 발굴해 고 무형문화재까지 만들어놓는데 힘을 쏟았으면 내 소임을 다한거다. 당신들은 놀이꾼이니까 지금부터는 이걸 가지고 운영해가면서 해라, 나는 그만두겠다 이랬지. 이론적으로는 내 나름대로 이론을 정립해가 지고 이대 가서 강의도 하고 했어. 각 대학에서 방학 때 탈춤 때문에 오고 하면 탈에 대한 미적 감각에 대한 것도 설명도 하고 탈이라 하는 것이 이런 것이다, 뭐 이런 활동도 했어요.

내가 있을 때 활동했던 사람이 이상호, 김춘택, 임형규……. 이 사람들은 지금 뭐 국제무대에서 활동하지. 사실은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지 허허허. 그 대신에 지금도 큰 행사 때면 이런 행사가 있다고 꼭 내한테 알려주고 인사를 해. 큰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모습 보면 뿌듯하고 그렇지.

 

겁 없이 뛰어든 사업으로 돈깨나 벌었지

어느 날 우연히 용상에 안동병원 있잖아. 그 안동병원을 지을 이사장이 당신을 좀 만나보고 싶어한다 그래. 그래? 그럼 함 만나보지 뭐. 뭐 때문에 그카냐니 까 그 양반이 와가지고 내가 병원을 지을라고 하는데 좀 같이 협조해서 병원 짓는데 어드바이스를 좀 해달 라 해. 짓는 거는 내가 지을게. 당신은 미술을 전공했으니까 도움을 달라 이캐. 뭐 내가 도울 게 있겠나 하니까 틀림없이 도울 게 있다 이래. 사실 미켈란젤로도 건축을 했잖아, 미술선생이 괜히 만능이 아니지.

그리 알게 돼 교류를 하는 중에 날더러 자기는 병원에 전념한다면서 자기가 하고 있는 파이프사업을 나보고 하라는 거야. 나는 사업 해본 경험도 없는데 그걸 맡아서 어예노 이카니까, 그렇다고 내가 이 사무실을 다른 사람에게는 줄 수가 없다. 이걸로 해서 병원을 짓는 기초가 된 사업인데 아무에게나 팔거나 할 수가 없다. 차라리 당신이 맡아서 해라, 이래. 그래서 그걸 인수를 하는데 당시 돈으로 꽤 컸어. 어마어마한 돈을 모을 수가 있나, 당신이 안동사회에 서 빌리던지 뭘 하던지 모을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내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 이캐. 그래 뭐 그만큼 날 신뢰해서 하자고 하는데 나도 함 노력은 해보자 싶어서 오만 동원을 해서 돈을 이리 빌리고 저리 빌리고 해서 끌어모았지. 다 모았다 이카니까 모았으마 됐습니다. 그 돈은 필요 없으니 돌려주세요. 이래. 알고 보니 내 능력을 시험해 본 거야. 사업이 첨에는 좀 힘들었지. 번만큼 뿌려야 된다고해서. 첫해는 손실은 안잃더래도 또이또이 하니 없어. 한 3년쯤 되니까 그때부터 여유가 생기더라고. 그렇게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지. 그게 경신산업, 이라는 회사랬어.

 

세기말, IMF의 시련

돈은 많이 벌었는데 사람이라는 게 참 묘한 것이. 저 집에 돈 좀 벌었다카면 시내 소문이 나잖아. 다른 사람들이 와서 자꾸 쑤시는 거야. 아니 그 돈 벌었으 면 이거 하지 말고 이것도 또 해봐라 카고. 자꾸 옆에서 쑤시덕거리는 거야. 그래가지고 하는게 뭐냐면 저 전라도 나주. 배 많이 나오는데 나주에 제약회사가 하나 있는데 그게 잘 안돼가지고 부도날 지경에 있는데 제약회사를 인수해라. 이런식으로 자꾸 쑤시렁거리는 거야. 그 제약회사가 한방에 들어가는 숙지황을 만드는 회산데 그 숙지황 카는게 이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재배를 많이 해요. 그 사람들이 여기서 재료를 가져가서 만드는데 여기에 공장이 있으면은 모든 경비가 더 적게 들고 좋으니께네 여기서 하도록 하자, 이러는 거야. 암것도 모르면서 그 꾐에 넘어간거지. 그래서 제약회사를 인수를 했어요. 그러다 일이 점점 커졌어. 중국에서 원료 사가지고 와서 판로 개척해서 전부 다 뿌려놓고 나니깐 그때 IMF가 터진거야. 망했지. 전국 약방에 깔아놓은 미수금이 당시에 2억 5천만 원이야. 요새 같으면 한 25억도 넘을 거야. 그걸 다 포기했잖아. 아주 쓰라린 경험이지.

그 길로 안동 생활을 정리하고 경기도 평택으로 이주한 거야. 사업에 전념하려고 학교도 그만뒀는데 부도가 나면서 다 날아갔지. 그리고 귀향 여기는 아파트 살던 아들이 땅을 사서 지은 집이야. 자꾸 아버지 내려오라 캐. 연세도 있다고. 내려와도 너하고 같이 안산다 그러이, 그러면 따로 사이소 이래. 바로 옆에 따로 살게끔 해준다고 해서 재작년에 내려와서 살고 있어. 결혼은 제대하고 나서 68년쯤 했나? 중매로 결혼했고 3남매를 뒀어. 지나온 날을 돌이켜보면 아이들 한테 미안치. 내가 학교 있으면서도 애들 관리를 못 했어. 원래 선생들이 아-들 관리를 못하거든. 그런데 애들이 참 아버지 얼굴 생각하면서 허튼 길로 안나가고 잘 커준거 그게 참 고맙고 보람이지.

딸은 수원에 살고 있는데 외손자놈이 물건이야. 탤런트 최원홍 이라고, 드라마 이산에서 왕자로 나왔어. 야는 유치원 때부터 아역배우로 해서 오래 했지. 대학 다니다가 작년에 군에 갔어. 인제 제대하면 올케 본격적으로 연예활동 해야지.

젊은 시절부터 내 삶은 미술이라는 중심축이 있었어. 사업도 했고 탈놀이회 활동도 했고 이래저래 발을 다 걸쳐보고 했는데 뭐든지 내가 맘먹으면 될 거 같았거든. 그래서 많이 시도해봤어. 여긴 차 없이 다니기 힘든 곳이잖아. 혼자 심심하면 글씨 쓰고 소일 하는 거지 뭐. 사실 여기 내려올 때는 그림 그리려고 내려왔는데 말이지.

 

단발머리 여고생들이 “미술 온다아~”하며 마룻바닥 복도를 뛰어다녔던 시절, 형형한 눈빛의 미술 선생님을 거쳐 사업가로 예술단체 회장으로 많은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은 지금의 김수진을 만들어 주었다. 소년시절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밀선을 탈까 생각도 했던 맹랑한 소년은 이제 팔순의 문턱을 넘었다. 전직 시장, 전직 국회의원, 전직 병원이시장 등 잘 나가던 친구들도 이젠 머리 희끗한 노인이 되었다. 유유자적, 시골 생활이 몸에 익은 어느 날 혹시 모를 일이다. 훌쩍 그 옛날 캔비스 둘러매고 다니던 시절처럼 스케치 여행을 떠날지도

백소애(기록창고 편집인)
2021-08-26 오전 11: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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