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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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원시사회와 문명사회를 가르는 상징 '전기'
안동의 전기 공급 역사와 농·어촌 전화(電化) 사업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7)

 

불이 번쩍! 전봇대가 세워지고, 전기불이 들어오던 날의 놀람과 신기함, 감동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그런 경험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기'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지금은 전기가 전자제품과 더불어 우리 생활에서 공기나 물만큼 가까이 쓰이고 있지만, 사회 기반 시설이나 발전 시설이 충분하지 않아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지역이 태반이었던 전기가 귀하던 시절, 그러다가 전깃불이 처음 들어오고 생활화 되면서 모든 사회는 급격하게 변화해 왔다. 그리고 전기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이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이 본격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 지났지 어지간한 농어촌들이 70년대 초반에 불을 밝혔지만 산 넘고 물 건너 전기를 끌어와야 했던 우리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늦었어. 1970년대 중반 쯤 됐는데 갑자기 이상한 복장을 한 여러 사람이 장화를 신고 우리 집 안방으로 쳐들어왔어. 이들은 천정에 못을 박고 벽을 뚫고 하더니 무엇인가 설치를 하고는 사라졌어. 그날 이후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지. 지금이야 하룻밤 촛불시위에 수만 개를 날려 버릴 정도로 초를 아주 우습게 알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초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어.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고는 매일 밤 촛불을 켠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 이렇게 초도 귀하던 시절 갑자기 전깃불이 들어왔으니 동네 노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했지"

 

   
►전기불 아래 바늘을 꿰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사진: 한전 경북지역본부)

 

"하루는 전기가 들어온 후 동네 부잣집에서 TV를 들여 놓았는데, 밤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몰려들어 마당에 멍석을 깔고 TV를 봤어. 그런데 이 TV가 볼만하면 정전이 돼는 거야.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밖에 바람이 불고 이슬비만 내려도 전기가 나갔어. 또 5촉짜리나 30촉 전구를 쓰는 집이 많았는데, 이 싸구려 전구가 툭하면 나가서 전기가 들어오고 나서도 아주 애를 먹었다니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이야 어지간한 태풍에도 전기가 안 나가니 얼마나 좋아.

 

"그뿐인가, 그 당시 나, 그 사람한테 시집 안 갈래. 그 동네는 전깃불도 안 들어온다니까!라고 말하는 농촌 처녀들을 흔히 볼 수 있었지. 어지간한 시골마을이면 전기가 보급되었던 시절, '전기도 안 들어오는 동네'는 곧 사람 살만한 곳이 못 되는 곳으로 생각됐던 거지" 고향이 녹전면이라는 김태용 씨는 고향집에 전기가 들어오던 당시를 이렇게 얘기했다.

 

1965년부터 시작된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이 시골 골짜기의 밤도 대낮으로 바꾸기 시작하면서, 촛불과 전깃불이 원시사회와 문명사회를 가르는 무슨 상징인 것처럼 돼버린 것이다. 이 같은 안동의 농촌의 풍경은 우리나라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고 나서도 약 70년이 지난 후의 모습이다. 이 당시 시골 사람들은 그래도 전기불을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당시 안동시가지나 면소재지에는 전기가 보급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전기불은 1887년도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전기불이 등장할 당시를 한국전력 박물관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887년 3월 6일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린 경복궁 내 건청궁.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깜빡 하는가 싶더니 처음 보는 눈부신 조명이 갑자기 주위를 밝혔다. '아~!' 주위에 모여든 남녀노소들이 모두 감탄사를 터트렸다.'

 

   
►경복궁의-전기시등도 (사진: 한국전력 전기박물관)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견한 지 고작 8년 만에 서울에 전등이 켜졌으니 당시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때만 해도 전기는 문명의 총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전등 가설에는 큰돈이 들었다. 궁정에 제일 먼저 전기불이 켜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향원정 연못가에 세워진 증기발전설비는 당시 동양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사용된 발전기의 조립, 설치, 전등 가설은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의 윌리엄 멕케이(William Mckay)라는 전기기사가 수행했다. 향원정 연못에서 물을 얻어 석탄을 연료로 발전기를 돌렸는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마치 천둥이 치는 듯 했다고 한다. 발전기 가동으로 연못 수온이 상승해서 물고기가 떼 죽음을 당한 후로, 전등을 일러 물고기를 끓인다는 뜻인 '증어(蒸魚)'라 부르기도 했으며, 또한 성능이 아직 완전치 못한 탓에 자주 불이 꺼지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게 꼭 건달 같다 해서 우스갯소리로 '건달불(乾達火)'이라 불리기도 했다.

 

   
►건청궁 옥호루 뜰에 설치된 아크등 (사진: 한국전력 전기박물관)

 

일제시대의 잘못된 역사교육 탓인지 최초의 전력사업도 일본이 도와준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후 전력사업을 독점한 결과 역사와 전통이 왜곡됐기 때문이다.

 

일본이 부산·인천·원산 등의 개항지를 중심으로 소규모 전력사업에 참여한 것은 1901년부터이다. 반면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인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고종황제가 미국인 콜브란(Colblan)의 조언 아래 이근배, 김두승, 두 사람의 이름으로 설립한 우리의 민족기업이다. 한성전기회사는 곧바로 서울시내의 전등·전차·전화사업 운영권을 허가 받아 사업을 시작하는데 전등 발명 이후 눈부시게 발달한 전기기술에 힘입어 설립된 이 한성전기회사가 바로 지금 한국전력의 모태가 됐다.

 

경복궁에서의 첫 시등(始登)이 조그만 자가발전설비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한성전기회사의 사업은 중앙의 발전소에서 배전설비를 이용해 일반 가정과 사무실에 전기를 공급하는 본질적인 전력사업이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마침내 전기의 상업화가 가능하리만큼 전력생산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1900년대 들어 한성전기회사는 전등 사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동대문 발전소에 200kW 발전설비를 설치, 전차와 전등에 전력을 공급한 것을 시작으로 1900년 4월 10일에는 단군 이래 처음으로 길거리에 조명용 전등이 등장한다. 전차를 야간에 운행시키기 위해 민간조명용 전등을 설치한 것이다. 비록 현대적 의미의 가로등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수천년 동안 해만 지면 길거리가 캄캄해지는 게 상식이었던 이 땅에서, 참으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대문 발전소 전경 사진 왼쪽편으로 동대문이 보인다.(사진: 한국전력 전기박물관)

 

1901년이 되면서 전등 보급이 더욱 확대되기 시작해 당시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에는 일본인 상가가 밀집해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민간조명용 전등 600개가 보급된 것이다. 정부의 고관대작, 외국사절, 상인을 비롯한 수많은 구경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치러진 진고개의 점등식은 서울을 떠들썩하게 만든 성대한 이벤트였다고 한다.

 

안동 최초로 전기를 공급한 안동전기주식회사

 

1887년 경복궁에 한국 최초의 전기가 들어왔다면 안동은 그보다 20년 늦은 1907년 안동우편국에서 우편과 아울러 전신 업무를 시작했다. 이 전신 업무가 안동에 들어온 최초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전신은 전등을 밝히거나 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기와는 다르게 전선을 가설해 통신을 주고받는 용도였지만 당시 유선 전신은 전선에 짧은 전류와 긴 전류를 흘려보내는 방식임으로 전기를 이용한 통신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기와 전깃불이 안동에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한창인 1925년에 12월 31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安東에 電燈架設(안동에 전등가설), 去年末日부터 點燈(거년말일부터 점등)'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이 기사내용을 살펴보면 '경북안동은 삼남지방의 유수한 고장인 소읍회로 있지만 아직 전등이 없어서 주민들은 항상 불만을 느끼는바 거년 봄부터 당지실업자 16인의 발기로 안동전기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이래 많은 노력을 거쳐 가설공사가 완성되었고, 12월 31일부터 점등 되었다고 쓰여 있다. 또한, 당국자의 말을 빌어 점등신청수가 예상이외로 많았다'고 전한다.

 

   
►1925년 9월 동아일보에 실린 안동전기주식회사 준공 기사(사진: 한전 경북지역본부)
   
►1925년 12월 31일 동아일보에 실린 '안동에 전등 가설'이란 제목의 기사(사진: 한전 경북지역본부)

 

이 기사내용을 토대로 유추하자면 안동에 본격적으로 전기가 들어온 시기는 1925년이라 할 수 있으며, 주민들은 전기의 용도와 그 편리함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안동전기는 어떻게 설립됐을까? 안동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되기 전 안동의 전기는 대부분 축전기를 이용했다. 그러다 보니 전기는 가진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고 가진자들에게는 돈 벌이의 수단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 안동전기주식회사였다.

 

1925년 9월 동아일보 기사에는 '경북 안동에서는 수년전에 축전지가 유행했지만 일시적이었다는 내용과 함께 당시 돈으로 10만원이라는 거금으로 안동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기록돼 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요약하면 안동전기주식회사는 당시 안동에서 이름 있는 사업가 16인이 발기해 당시 돈으로 1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 10만원도 1주당 50원씩 2천주의 주식을 발행해 마련했다.

 

   

►1920년대 안동시가지 모습 사진에 전봇대와 전깃줄과 함께 목욕탕 건물도 보인다.(사진: 사진으로 보는 근대 안동-서문당)

 

위 사진은 1920년대 안동 시가지를 찍은 것으로 안동전기주식회사가 전봇대와 전깃줄 가설 공사를 마친 이후 일 것으로 추정된다.

 

전기가 공급되자 안동의 산업도 급속도로 발전한다. 1930년대에는 농업부문의 감소와 공업부문의 비중확대의 경향은 192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전기가 공급된 이후인 1933년 4.0%에 불과하던 상업부문이 1937년에는 6.0%로 급속히 비중을 확대했던 것이다. 안동지역 공업 인구는 전기가 완전히 자리 잡은 193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빠르게 늘어났다. 특히 일본인 공업 인구가 그랬다. 여기에는 일제가 이 시기에 한반도를 군수산업기지로 만들어가는 정책을 펼치던 때였고, 그 영향으로 일본인 이주자가 몰려든 현상과 맞물려 돌아갔다. 또한 기타부문에서도 같은 기간 동안 7.5%에서 10.2%로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전기가 있었고 안동전기주식회사가 있었다. 안동전기주식회사는 1925년 9월 변전소 준공 등 안동의 전기 공급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회사였다.

 

   

►1925~1939년까지 안동시 삼산동 83-2번지에 있었던 안동전기주식회사 사옥 자리와 현재 모습

 

하지만 안동전기가 설립될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호경기와 내연기관의 발달로 국내 전기사업이 더욱 확대되던 시기였다. 1921년부터 1930년까지 10년 동안 전국에서 50개의 전기사업체가 허가, 신설되고 기존 업체도 공급구역을 대폭 확장해 전기사업 난립시대가 한동안 진행됐다. 그리고 전기사업 발전과 함께 원거리 송전기술도 발달되어 수자원 개발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안동전기가 설립되던 시기에는 전력요금의 인하문제로 시민과 전력회사 간에 대립이 격화되어 전력사업의 공영론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특히, 1927년 평양전력회사의 평양부영(平壤府營)이 실현되고, 서울과 부산의 시민운동은 1931년 12월 총독부의 전력통제계획으로 자연 해소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 1923년 중대리(강원도)~서울 간 66kV 166.9㎞의 송전선이 완성되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특고압 송전선로의 효시이기도 하다.

 

안동전기도 전력요금 문제로 시민들에게 많은 반감을 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기요금의 가격이 얼마로 책정 된지에 대에서는 별다른 기록을 찾지는 못했으나 설립 후 꾸준히 전기요금을 인하했다는 기록은 당시 신문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1934년 안동전기회사 요금인하 관련 기사. 별다른 내용은 없고 제목으로만 이뤄졌다.(사진: 한전 경북지역본부)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전기는 지역의 작은 전기회사였다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1936년 대구전기와 함흥전기가 합병한 대흥전기로 병합, 대흥전기 안동지점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이후 대흥전기는 1937년 4월 부산조선와사전기, 대흥전기, 대전전기, 목포전등이 합병해 설립, 다시 성남전기, 강릉전기를 합병한 남선전기주식회사 대구지점 안동출장소로 상호를 바꾸게 된다.

 

이 남선전기는 1961년 한국전력공사로 통합되기까지 오랫동안 경북을 비롯한 영남지역 일대와 충청도, 강원도 등에 전력을 공급했다. 하지만 남선전기도 요금인하의 압박과 영남파, 호남파, 기호파 등 파벌간의 암투로 경영난을 겪게 된다. 이런 상황은 급기야 전력생산계획과 배전계획을 일원화 시키려는 정부로 인해 경성전기주식회사, 조선전업주식회사와 통합으로 이어진다.

 

통합 당시 남선전기와 관련 경향신문은 '온 몸이 마치 만신창이와도 같이 수습할 수 없는 난경에 다다른 남선은 삼사종합론이 제기되자 퇴직서의 사태를 이루었다. 평생을 바쳐온 직장을 떠나려는 결심을 하기까지 비상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을 것이나 남선의 장기 근속자 수가 178명으로 모두 사표를 내고 퇴직금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려면 4억환이라는 돈이 필요하고'라고 적고 있다.

 

위 기사의 내용을 봤을 때 당시 남선전기가 처한 상황이 보인다. 그 당시 남선전기는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고 반달치를 지급하는 등 경영난을 겪고 있던 시기였으니 4억환이라는 돈은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돈이었다. 따라서 남선전기는 통합보다는 배전구역에 따라 일제 강점기에 적용했던 것과 비슷한 요금의 차등비율제 실시가 긴요하다고 강조하고 파벌적 대립의 이유로 통합을 반대하게 된다.

 

   
►1939~1980년도까지 안동시 남문동 180-1번지에 있었던 남선합동전기(주) 대구지점 안동출장소.

 

하지만 1961년 남선전기는 결국 통합되기에 이르렀고, 남선전기 대구지점 안동출장소 역시 한국전력(주) 경북지점 안동영업소로, 1982년 한국전력공사 경북지사 안동지점(2급), 1987년 한국전력공사 안동지점(1차 사업소), 1990년 한국전력공사 안동지사(개칭), 1997년 한국전력공사 경북지사(개칭), 2009년 한국전력공사 경북지사(1급), 2015년 한국전력공사 경북특별지사(본부 직할), 2017년 한국전력공사 경북지역 본부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현재 안동지역에서 한국전력의 모태가 된 안동전기는 비록 10여년이란 짧은 기간 존재했지만 안동에 최초로 전기를 공급한 회사로 그 상징성이 남아 있으며, 이후 한국전력까지 이어오는 동안 전기의 공급도 더욱 많아지고 활발해 졌다. 특히 안동지역은 안동댐이 만들어 지고 1976년 9월30일 KWH당 15원65전에 한전에 전기를 공급함으로써 전기를 공급받는 지역에서 전기를 공급하는 지역으로 위상도 변하게 됐다.

 

   
►1976년 9월 30일자 경행신문에 실린 안동댐 전기 한전에 공급 기사(사진: 한전 경북지역본부)

한편, 남선전기주식회사는 사옥은 아직 부산시에 남아 있으며, 2007년 7월 3일 등록 문화재 제329호로 지정됐다. 1932년 건축 당시의 내부 구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인조 대리석 소재의 계단실 난간, 벽면의 대형 금고, 라디에이터 등과 일부 목재 문도 잘 남아 있고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남선전기 사옥은 부산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곳으로, 1970~1980년대까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기계를 제거하고 바닥을 만들어서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1965년부터 시작된 농·어촌 전화(電化)사업

 

각 지역에 존재하던 전기공급회사가 한국전력으로 통합된 뒤 전기보급은 그야말로 활기를 띄게 된다. 1965년부터 시작된 농·어촌 전화(電化)사업 때문이다.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은 1965년 제정된 뒤 2003년 12월 법률 7058호까지 11차례 개정된 사업이다. 적용대상은 행정구역을 불문하고 이 법에 따라 전화사업 계획을 세울 때 지역주민의 대부분이 농·어업을 영위한 촌락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한 기준에 맞는 지역으로 배전시설과 자가발전시설 및 개체공사에 소요되는 비용은 재정융자금과 그 밖의 융자금, 전기수용자의 일시부담금,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으로 충당, 내선설비 공사비는 전기수용자가 부담하는 사업이다.

   
►1965년부터 시작된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사진: 한국전력 전기박물관)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은 안동에서도 전기보급률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업을 시작한 1965년 말 우리나라 농·어촌 12%, 도시 51% 수준에 불과했던 전화율(電化聿)이 1979년이 되면서 보급율이 전국 평균 96.7%로 급상승하게 된다. 지속적으로 추진된 전화사업은 1987년이 되면 보급율이 99.8%에 이르러 명실공히 세계 제1의 전기보급률을 자랑하게 된다. 무인도나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을 제외한 우리 국토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전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70년까지도 전기 구경 못해봤어. 그저 촛불이나 등잔, 기름램프가 밤을 밝히는 전부였지. 그러다가 몇 년돈지 기억은 안 나지만 70년대 초에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어. 비록 작은 백열등이었지만 어찌나 환하든지 무슨 신천지를 만난 것 같았다니까. 그리고 어느 공무원의 아이디어인지 하회마을은 전기가 들어가고도 초가집을 걷어 내지 않고 그냥 남겨 놓았다더라고, 그게 이제서 생각하니까 정말잘한거야 그러니까 유네스콘지 뭔지에도 선정되고, 관광객들도 꾸준히 찾아오고 하는거지 그때 그 초가 다 바꿨으면 지금의 하회마을이 있나 어디"

 

한국전력 경북지역 본부에서 만난 한 어르신의 얘기처럼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낙후됐던 농·어촌의 모습도 변하게 된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한전 직원들의 희생도 있었다.

 

   
►1965년부터 시작된 농·어촌 전화(電化)사업 당시 한전 직원들이 전봇대를 세우는 등 전기 공사를 하는 모습(사진: 한전 경북지역본부)

 

"시내 OO동인데요 전기가 안들어와요. OO동인데요 변압기가 나갔어요. 당시 사무실에 전화기가 쉴세 없이 울려. 전부 고장신곤데 그 당시 무슨 고장신고가 그리도 많은지 그 당시에는 하기야 그때는 정전도 자주 일어나고 했지. 아무튼 고장 신고를 받으면 보수하러 나가야 되는데 요새처럼 안전장치나 무슨 사다리 차량이 많았던 시절도 아니고 그저 안전벨트, 헬멧, 고무장갑 끼고, 뺀치, 드라이버, 검전기 들고 전봇대에 오르거나 끊어진 전선 손질할 때는 일단 겁을 내야 돼 겁을 내야 사고도 덜나. 그 고충 아무도 몰라." 안동과 의성 등에서 한국전력 노조위원장을 역임하다 퇴직한 피재만 씨의 설명이다.

 

"전기가 없으면 얼마나 불편해 차지하는 비중이 아마 공기, 물 다음 세 번째는 될 걸. 근데 공기, 물의 고마움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처럼 전기의 고마움도 몰라. 요새 전기가 안 들어온다고 생각해봐. 그러다 보니 밤낮없이 현장에 나가는 거지. 안동시내 가정집에 기업체에 내 손 안 거친데가 있나. 비가오나 눈이오나 고장신고만 있으면 바로 달려갔지 옛날에는 비가 많이 오면 변압기가 자주 터졌어. 또 차들이 사고내서 전봇대가 부러지고 하면 즉시 보수해야 되는데 날씨가 무슨 상관이야"

 

   
►1973년 한전직원들이 안전벨트에 의지한 채 전봇대에 올라 전깃줄을 보수하고 있다.(사진: 한전 경북지역본부)

 

"하도 힘드니까 후회도 많이 했지. 눈, 비 오는 날이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밤낮없이 비상대기야 특히 태풍이라도 불면 24시간 대기해야 돼. 이런 날 사고가 제일 많이 일어나거든. 전봇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 곡예도 해보고. 그래도 보람도 있고...나름 뒷돈도 챙기고 그래 살았지. 요새야 안 그러지만 70년대 초만 해도 공장 같은데 전기 보수하러 가면 사장이 먼저 나와서 무슨 칙사 모시듯 하고 그랬어. 작업 다 마치고 올 때면 술값도 두둑하게 주고"

 

"동료직원들도 많이 먼저 보냈지 78년돈가 끊어진 전선 보수하러 간 동료가 전류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보수하다가 감전됐어. 이를 지원하러 간 동료도 또 감전되고 그래서 한꺼번에 두 명을 잃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파. 거기다 도둑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명절이면 꼭 도난 사고가 생겨 구리가 귀하고 비싸니 사람들 잘 안다니는 산간벽지에 몇십미터씩 끊어 가버려. 신고 받고 가보면 도둑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밥도 못 먹고 보수하고 돌아오면 또 다음날 끊어 가버려. 경찰도 아닌데 밤에 잠복근무도 하고 그랬어."

 

현재까지 안동에 마지막으로 전기가 공급된 마을로 남아 있는 임동면 박곡리 '광산마을'

 

1965년 농·어촌 새마을 전화사업으로 전기가 보급되고 1987년 보급율이 99.8%에 이르렀지만 그때까지도 안동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마을이 있었다. 바로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 있는 광산마을이 그 주인공이다. 임동면 광산마을은 인근의 박곡마을과 4㎞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전기의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고 촛불로 불을 밝히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전기를 모르고 지금까지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임하댐 건설로 고향이 물에 잠긴 주민들이 이곳 광산마을로 터전을 옮겼다. 그들이 임하댐 수몰지역에 살 때는 당연히 전기가 공급됐고, 전기의 혜택을 누리고 살았다. 하지만 광산마을로 새롭게 이주하고 나서는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광산마을로 이주를 한 가구가 4가구 밖에 되지 않아 전기를 공급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2008년까지 6년은 전기가 없는 환경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다 2008년 거주 주민이 4가구에서 5가구로 늘면서 안동시는 이 광산마을을 지식경제부에 5가구 이상 전기미공급지역으로 보고했다.

 

한국전력공사 경북지역 본부도 마을의 가구수가 5가구가 되자 지식경제부에 안동시 박곡리 광산마을의 전기 공급의 필요성을 보고하고, 현장실사를 거친 뒤 정부예산 4천4백만원, 안동시 1천 4백만원, 재정융자 5백만원 등 총 6천4백여만원을 들여 전신주 57개 변압기 1개 등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 광산마을이 현재까지 안동에서 마지막으로 전기가 공급된 마을로 남아 있다.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광산마을에 2008년 전기가 공급되던 당시 모습. 이재형 할아버지와 안장수 할머니(사진 가운데)가 전기불이 들어오자 천정에 걸어두었던 남포등을 내리고 있다.

 

"이제까지 '남포등(유리관으로 덮인 석유등불)'이나 촛불로 불을 밝혔제. 여 주민들 모두 60~80대 노인이래. 촌에 다들 농사를 짓고 살다보이 피곤하기도 하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다 보니 해가 지면 할 일이 없어. 여름엔 저녁 8시, 겨울에는 5시만 되면 자리에 누워 자는 기제." 당시 마을에 거주하던 이재형 할아버지는 점등식 취재를 위해 방문한 필자에게 전기가 없던 시절의 생활상을 이렇게 얘기 했다.

 

"외지의 자식들이 명절이나 생일에 머를 자꾸 사가꼬 와 그거 사와도 여름이믄 쉬 상해뿌래. 그날 다 못무믄 다 내삐리야 돼. 근데 인제 냉장고를 킬 수 있으니 얼매나 좋노. 뭣보다 여름에 시원한 물을 맘대로 먹을 수 있으이 좋고 밭에 나갈 때도 시원한 물 가꼬 나갈 수 있고 하이 여름에 더위도 들 타고 인자 살맛나제 허허. 벌써 속이 시원하다 카이. 그카고 인자 텔레비전도 볼 수가 있어가 뉴스도 보고 그라는 거제." 이재형 할아버지는 다시 전기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 마냥 좋은 듯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얼굴로 당시 필자에게 소감을 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전기가 당연한 시대를 산 필자는 그 기쁨의 정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열심히 적고 있던 필자에게 "우리가 원래 전기가 없었는데서 살았는게 아니거등 임하댐이 생기니까 이주해야 돼서 일로 왔는데 집만 덩그러니 있고 전기가 없어. 일로 이주해 왔던 집이 몇 집 안 되니까......시에서도 전기를 안 넣줘 뭐 법이 글타니까...... 첨부터 몰랐다면 몰라도 있다 없으니 이게 얼매나 불편한지 몰래. 우리야 전기가 없던 시절을 더 오래 살았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이만저만 불편한기 아이래." 옆에서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계시던 안장수 할머니가 기어코 한마디 더 거들었다. 벌써 9년 전 얘기지만 그 기록은 필자의 오래된 취재수첩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광산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던 날 마을 주민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전기가 들어오던 2008년 8월 14일 광산마을은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그 기쁨의 자리에 당시 안동시장이던 김휘동 시장과 김경동 안동시부의장, 김임호 한국전력 경북지사장, 권기익 시의원 등 수많은 인사들이 방문해 점등식을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김휘동 전 시장은 "광산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한편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시장으로서 좀 더 주민의 편의에 힘을 쏟아 더 일찍 전기가 들어오게 했어야 했지만 이제야 들어오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마을 주민들을 위로했다. 임하댐으로 인해 수몰민이 된 것도 서러운데 전기 혜택까지 못 받고 살았으니 당시 김 시장의 마음도 편치 못했으리라 감히 짐작해 본다.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는 전기 공급··돈 주고 공급받던 전기 이제 스스로 해결한다!

 

이전 세대 어른들에게 전기는 당연히 나라에서 각 가정으로 공급해주고, 그 사용량만큼 돈을 지불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기 공급의 양상도 바뀌기 시작했다. 더 편리한 생활을 위해 수많은 가전제품이 개발·생산됐고 그 사용 또한 늘어남에 따라 전기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1920~30년대 전기요금 인하의 바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바람이 됐다.

 

폭발적인 전력 수요로 인해 한전에서는 전기를 아껴쓰라고 강조하고, 각 가정과 시민단체들은 기업의 전기요금과 가정용 요금이 형평성에 맞지 않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한 여름과 한 겨울 가정용 전기의 누진제로 인한 요금 폭탄은 서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고, 편리한 생활을 위해 마련한 가전제품도 마음껏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거기다 2017년 정부는 탈 원전을 선언하며, 원전 건설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전기료 인상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한국전력 실시간 전기 수급 현황(사진 한전 경북지역본부)

 

이러한 상황에서 대체 에너지 발전 기술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정부는 더 이상 화석에너지를 이용한 발전과 인류에게 재앙이 될 수 있는 원자력 발전 대신 태양광이나 풍력, 등 청정에너지 발전으로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는 전국 지자체나 개인들에게도 유행하고 있는데 각 지자체의 공공건물이나 시설 등에 태양광 발전이 설치되고, 각 가정집에도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해 전기요금 폭탄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안동에서도 정부 방침에 따라 태양광발전 등 친환경에너지 발전을 독려해 매년 선착순으로 시설의 초기 설치비용에 대해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까지 안동시의 태양광 발전 시설 현황을 살펴보면 2017년 6월 현재 PPA(Power Purchase Agreement) 고객이 164가구, 시설용량 24,225kW이며, 상계거래고객이 1,390가구, 시설용량 4,267kW에 이른다. 또한 2017년 6월 PPA고객으로부터 한국전력이 구입한 전기는 3,220,081kW나 된다.

 

※ PPA : 전력수급에 관한 계약으로 발전회사가 단일 구매자인 전력회사에 전력을 판매하는 형태.

 

※ 상계거래고객 : 일반 주택의 옥상 등에 설치된 소용량의 태양광 발전 설비에서 발전된 전력을 설비소유주인 고객이 구내에서 우선적으로 소비하고, 남은 잉여전력이 발생할 때 그 전력을 별도로 계량해 두었다가 고객의 소비 전력에서 상계해 주는 거래방식.

 

전기는 이제 더 이상 공급 받아 사용하는 것이 아닌, 각 가정이나 개인 등이 스스로 전기를 생산해 사용하고, 일부는 생산한 전기를 한국전력에 다시 팔아 수입을 올리는 구조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기는 우리의 삶을 이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펼쳐질 첨단 미래를 앞당겨 우리의 삶을 보다 편리하고 풍요롭게 바꿔나갈 것이다.

 

피현진(UGN경북뉴스기자)/피연화(경북와이드뉴스기자) 

피현진/피연화
2017-11-10 오전 10: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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