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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탐방 '같이 가볼까'⑧-새벽 강으로 간 사람들

  • 신준영(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 2020-12-01 오전 10: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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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씌웠다. '마스크의 시간'은 다 보여주지도 말고, 다 말하지도 말라는 뜻일까. 다 보려하지도 말고, 다 들으려 하지도 말라는 뜻일까. 답답해하는 아이의 입을 호통으로 막고 숨차하는 노인의 입을 호소로 막을 수밖에 없는 격리의 날들이 지난하게 흘러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들 속에서 사람들은 혼자 할 수 있는 일, 혼자 갈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선다.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하여 잃어버린 이전의 일상이 얼마나 그리운지를 토로할 수 있는 각자의 장소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에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장간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김현주

 

어떤 간절한 마음으로 새벽을 걸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걷기는 초여름에 시작해서 다음해 봄에 끝이 났다. 새벽잠이 많은 나에게는 처음 얼마간은 고통에 가까운 일이었다. 겨울 새벽의 걷기는 더욱 그러했다. 추위와 어둠과 잠의 위력을 모두 떨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 지켜내야 할 사람이 있었고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으므로 불가능도 가능했던 시간들이었다. 견딤의 시간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난 후 새벽의 걷기는 나에게 다시 펼쳐보고 싶지 않은 앨범 같은 것이 되었다. 오래된 이야기다.

매일 새벽 강을 따라 걷는 가까운 친구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간, 강에 나가 걷는 일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새삼스러운 궁금함이 일었다.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새벽에서 아침 사이, 외면했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기로 한 것이다.새벽 6시 30분 낙동강변 음악분수 주차장, 친구들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후드 티 모자를 뒤집어 쓴 맨 얼굴들이다. 새벽잠을 떨치고 나왔으니 나나 친구들이나 모습이 크게 다를 리가 없다.

오늘 아침 걸을 코스는 음악분수 앞 주차장에서 영호대교를 지나 안동대교 가까운 어디가 될 것이다. 친구들을 앞세우고 카메라를 든 나는 앞뒤를 살피며 뒤에서 천천히 따른다. 돌아서서 영가대교 쪽을 보니 구름에 살짝 가리긴 했지만 해가 떠오르고 있다. 붉은 기운이 하늘에 스미고 있다. 오랜만에 꽤 부지런한 사람이 된 듯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멀리서 가까이서 하나씩 둘씩, 때로는 셋씩 저마다의 리듬대로 새벽 공기 속으로 몸을 저어가는 사람들. 하나 같이 마스크를 한 얼굴이다.
 

 

몇 개월 사이 마스크가 얼굴의 일부가 되었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뿐이다. 이어폰을 낀 사람, 모자를 쓴 사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크게 음악을 틀고 가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반려견을 앞세워 가는 사람, 뛰어가는 사람, 손을 잡고 가는 사람,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 운동 기구를 다루는 사람, 혼자서 게이트볼 연습을 하는 사람, 노상에 전을 펴려는 사람, 양산을 든 사람, 사람,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강에 나와 있다. 서울시가 코로나19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여의도·뚝섬·반포한강공원 내의 이용객 밀집지역에 대한 출입을 전면 통제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폐쇄 되는 광장들의 소식 역시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에 비하면 내가 살고 있는 이 고장의 강과 광장은 다행히도 얼마나 자유로운 곳인가 싶어진다. 트인 공간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걸을 수 있는 자유에 대해 또 생각 하자니 새벽잠의 유혹 쯤 별 거 아닌 것이 된다. 새벽 강에는 사람만 나와 있는 것은 아니어서 까마귀 몇 마리가 바닥에 내려와 죽은 짐승의 살조각을 뜯고 있다. 그들에게는 일찍 몸을 움직여 얻어낸 큰 성과물이겠다. 강변 나뭇가지에는 참새 떼가 분주하고 청둥오리들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 위를 천천히 흐르고 있다. 다리 위를 달리는 자동차와 하늘을 걷는 구름들, 바람들.

도로가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서야 오늘이 한글날임을 깨닫는다. 휴일이라서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 건가 싶다. 목적지를 먼저 돌고 오는 친구들을 만나 현답을 기대하며 우문을 던져본다. "이 새벽에 나와서 매일 걷는 이유가 뭐야. 도대체?" "처음엔 허리가 아파서 걸었지. 평지를 천천히 걷는 게 근력 운동에 좋다고 해서. 그런데 걷다보니까 이게 일종의 중독인 거야. 다 걷고 났을 때 오는 개운함. 그리고 매일 나오다 보면 부딪히게 되는 사람들이 있어. 상대도 나를 알아 보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저 사람 복장이 바뀌었네, 같이 오던 사람은 오늘 왜 안 왔을까, 혼자상상하면서 반가워하기도 하고 서운해 하기도 하지. 서로 인사를 건네지는 않지만 보면 좋고 안 보이면 궁금하고 그래."

"그럼 왜 하필 강이야?"시내 거리도 걸어봤는데 신호등도 만나고 자동차도 만나고 건물도 만나고 하다보면 맥이 끊겨. 집중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뭔가를 늘 골똘히 생각하면서 걷는 건 아니지만 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걷기엔 방해물이 없는 강이 좋아." 또 다른 친구가 하는 말은 이렇다. "운동이나 걷기를 즐기지는 않지만 코로나 때문에 타의적으로 실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 오히려 자연이나 야외 활동에 대한 욕구가 생겼어. 새벽 6시 반에 강변에 나오니 이제껏 보지 못한 하늘과 나무와 풀이 보이더라. 다음 날 같은 길을 걷는데 어제 보지 못한 나무와 풀과 하늘이 또 보이는 거야.

새벽의 짙푸른 공기가 차차 밝아지는 것이. 모든 것에 귀 기울이게 되고 눈여겨보게 되는 거야. 그리고 나를 보게 돼. 강변의 나무는 나무로서, 풀은 풀로서, 핑크뮬리 위에 내려앉은 이슬은 이슬로서 오롯이 보게 되는 거. 나도 새로운 심장으로 날마다 태어나는 것 같아. 한 시간의 걷기는 강변의 모든 소음과 바람과 나를 섬기게 해줘." 아, 이런 고차원적인 답변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어느새 날은 다 밝아 세상은 거짓말처럼 환하다. 외면했던 앨범을 다시 펼쳐볼 용기가 생겨난다. 한때 아프도록 환했던 그 얼굴과 다시 눈이 마주쳐도 이제 나는 아무렇지 않겠구나 싶은 아침이다.

* 본 글은 『기록창고』 8호에 수록된 내용이며 E-book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준영(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2020-12-01 오전 10: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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