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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의 현장 '그곳'④-『몽실언니』의 무대를 찾아서

  • 안상학(시인)
  • 2020-12-01 오전 10: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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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의 얼굴은 둥글고 넓적하다. 코도 납작하고 눈은 작은 편이다'(『몽실 언니』, 2010, 개정3판, 173면)고 권정생은 묘사한다. 단발머리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몽실이를 생각하면 단발머리다. 이철수의 표지 그림의 탓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가난한 집 딸들의 대표머리가 아닌가. 권정생은 몽실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첫 장편 『슬픈나막신』(우리교육, 2002)에 나오는 '하나꼬'에서 확장한것이라고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나꼬의 눈은 초생달처럼 조그맣다. 이마 위에서 노란 단발머리가 나풀거린다'고 그리고 있다.

두 번째 장편인 『초가집이 있던 마을』(분도출판사, 1985)의 화순이도 '납작하고 동그란 얼굴이다. 눈도 동그랗고, 코도 동글납작하다. 저희 어머니가 가위로 깎은 단발머리가 흡사 뚝배기를 씌워놓은 것처럼 우스꽝스럽다'고 그리고 있다. 세 번째 장편소설인 『몽실 언니』(창비, 1984)의 몽실이도 다르지 않다. 예쁘지는 않지만 착하고 독하지는 않지만 끈질길 생명력을 가진 인물의 전형으로는 아삼륙이다. 전쟁 세대들에게는 너무나 친근한 이웃이자 자신의 얼굴이기도 한 몽실이다

권정생은 정호경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이야기는 저의 불쌍한 사촌 누이 동생 이야기이기도 하고, 제비원 산다는 어느 아주머니 얘기이기도 하고, 뭐 이런 불행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 번 써 본 것'(『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종로서적, 1986, 262면)이라고 적고 있다. 몽실이는 실존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몽실이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전쟁통 속의 수많은 아이들 모두가 주인공인 셈이다. 그 시대를 겪은 많은 사람들이 몽실이를 보면서 눈물을 짓는 까닭도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몽실언니』 ⓒ창비

 

그러나 몽실이가 주는 감동은 단순히 눈물에만 그치지 않는다. 더 깊은 감동과 여운으로 이끌어가는 힘이있다. 그것은 몽실이의 남다른 생각과 행동이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그저 겪기만 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민군이나 국군 할 것 없이 다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대상을 용서하는 마음,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개가를 하거나 몸을 팔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연민, 배가 다르거나 씨가 다르더라도 다 같은 형제자매라는 어른스러움, 나보다 못한 사람을 위하는 사랑, 나보다는 다른사람에게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희생정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몽실이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면서 공감하다 보면 어느새 몽실이를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몽실 언니』의 힘이다. 독자들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이야기와 생각과 행동을 대신해 주는 몽실이를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동시에 감동의 확장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 권정생의 생각이다. 몽실이는 내가 아는 권정생의 생각과 행동을 빼닮았다. 권정생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몽실이를 앞세워 차근차근 들려주려고 한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권정생은 몽실이와 같이 몸소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동경에서 태평양전쟁을, 귀국해서는 한국전쟁에 휩쓸린 것이다. 전쟁을 정의 할 때는 몽실이의 입도 모자라서 화자가 되어 직접 개입한다. '짐승 같은 나쁜 사람들이 일으켜 놓은 전쟁으로 억울하게'(『몽실 언니』, 172면)사람이 죽은 것이라든지, '육이오라는 전쟁도 꼭 같은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몽실 언니』, 265면)것이라고 전쟁의 폐해에 대해 아프게 꼬집곤 한다. 평생 그는 반전평화주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어른들이 벌이는 전쟁으로 아이들이 고통을 겪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많은 어린이들을 죽게 한다. 뿐만 아니라 굶고 병들고 다쳐서 남는 육체적인 후유증과 교육을 받을 시기를 놓쳐서 평생 반쪽으로 살아야 하는 회한을 남긴다. 권정생은 이 둘을 고스란히 안고 살았다. 몸이 건강했다면, 공부를 많이 했다면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을 한적이 있다. 전쟁이 남긴 상처다. 몽실이가 끝내 절름발이로 꼽추와 살아갈 수밖에 없게 설정한 것도 여기에 닿아 있다. 분단의 지속에서 통일의 불안함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통일을 갈구했던 권정생은 끝내 그날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전쟁을 겪은 수많은 몽실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1950년 경인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니 2010년이 꼭 한 갑자다. 사람으로 따지면 환갑을 넘긴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고통을 겪은 몽실이라는 캐릭터가 세간에 알려진 지도 자그마치 30년이 지났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지만 아직도 이 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요 휴전 상태의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다. 권정생 문학의 결론이 있다면 그 앞자리는 당연히 통일이다. 권정생이 가고 난 자리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권정생 문학 세례를 받은 세대들과 그 자녀들에게 권정생은 각별하다. 지금도 그의 생가(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7번지)와 유품전시관(안동시 명륜동317-1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는 이들로 붐비고 있다. 여기에 장편소설 『한티재 하늘』(지식산업사, 1998)현장이 더해지면서 훨씬 생동감 있는 답사가 이어진다. 하지만 내용이 청소년들이 접근하기 쉬운 것이 아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청소년들에게도 권정생의 문학과 삶을 일깨울 수 있는 현장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몽실 언니』 현장을 찾은 것이다.

이 작품은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권정생의 문학관과 가치관은 물론이고 분단 과정의 비극과 전쟁의 참상, 통일의 당위를 일깨워 준다. 단발머리 몽실이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가볍지 않은 인생의 이면을 체험하는 것 또한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 글은 글쓴이의 감동보다는 현장을 찾는 이들을 위한 길 안내서에 가깝다. 찾아가서 느끼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운산리 부근 ⓒ안상학

 

살강마을
『몽실 언니』의 무대는 중앙선 기차 정거장이 있는 장터마을(경북 안동시 일직면 운산리) 동남쪽으로 둘레둘레에 있는 노루실, 삼거리, 까치바위골, 살강마을과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 댓골마을, 그리고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4가에 있는 메리놀병원 등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마을은 살강마을이다. 몽실이는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태평양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아버지 정씨가 불길 속에서 어린 몽실이와 밀양댁을 구해낸 대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해방이 되고 이듬해인 1946년 봄에 귀국하여 고향 근처 살강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권정생도 이와 닮은 길을 걸었다. 살강마을은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있다. 장터마을에서 5번 국도를 타고 대구 방면으로 2km 정도 내려가다 왼쪽으로 79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약 10km 정도 고운사 방면으로 가면 구계2교가 있다. 바로가면 고운사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외천이라는 동네를 만난다. 그 골짜기 끝이 살강마을이다. 오래 전에 소개되어 현재는 비어 있다. 속칭으로 흔히 '살가리', '사갈沙葛마을', '살갈마을'로 불린다.

소설 『한티재 하늘』(지식산업사, 1998)에도 나오는 마을이다. 몽실네가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들을 '일본거지'로 불렀다. 나라 잃고 타국에서 보낸 서러운 사람들을 보듬어 않을 만한 인심이 없을 때였던 것 같다. 몽실이 아버지도 이런 멸시 속에서는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일자리를 구해 이리저리 나다니는 무능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게다가 아내 밀양댁을 자주 때리는 것으로 암시되어 있다. 견디다 못한 밀양댁은 정씨가 없는 틈을 타서 굶주림과 폭력을 피해 몽실을 데리고 개가 길에 나선 것이다. 동무 희숙이 몫의 소꿉까지 챙겨 품고 따라나선 몽실이의 나이 일곱 살이었다.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해방정국의 격랑이 높아만 가던 시기였다. '그런 어려운 때에 가엾은 몽실에게도 슬픈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몽실 언니』, 12면)며 권정생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귀국해서 살강마을에 정착한 지 일 년을 못 넘기고 몽실네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 셈이다. 몽실은 언젠가 살강마을로 돌아가면 희숙이에게 용서를 빌려고 했으나 끝내 그럴 수 없었던 엇갈린 운명의 길로 접어들고 만 것이다.
 

▲댓골마을 ⓒ안상학

 

댓골마을
남편을 버리고 개가를 결심한 밀양댁의 손에 이끌려 몽실은 길을 나섰다. 운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단촌을 지나 의성역에 내렸다. 마중 나온 새아버지 김씨를 처음 만났다. 신작로를 지나 냇물을 따라 난 비좁은 샛길로 접어들어 큰 재를 넘어 댓골로 멀쩡하게 걸어 들어간 몽실이는 훗날 절룩이며 돌아 나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권정생은 '다섯 정거장인지 여섯 정거장인지를 지나서 내렸다. 몽실이가 살던 곳의 기차 정거장보다 더 작고, 더 보잘 것 없는 정거장'(『몽실 언니』, 15면)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1953년 중앙선 기차 시간표(코레일 제공)를 보면 운산에서 의성 사이에는 단촌역 밖에 없다.

1980년에야 단촌역과 의성역 사이에 업동역이 정거장 구실을 더했을 뿐이다. 또 먼저 생긴 의성역(1936년)이 나중에 생긴 운산역(1940년) 보다 작지 않았다. 소설적 설정이라고 봐야 한다. 운산역은 보통역으로 출발하여 2007년부터는 승객이 타고 내리지 않는 통과역으로 존재하고 있다. 의성역에서 댓골 가는 길은 우선 군청 방면으로 신작로를 따라간다. 의성읍 상리 마을을 지나 912번 지방도를 따라 4km 정도 가면 문고개다. 여기서부터 의성군사곡면이다. 사곡을 가로질러 사곡재를 넘으면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 댓골마을에 이른다. 의성역에서 댓골까지 거리는 약 23km 정도다.

걸어서 어른 걸음으로 꼬박5시간 정도 소요된다. 댓골의 지명유래는 '골짜기가 대통처럼 곧게 뻗어 들어간 곳'에서 얻은 이름이다. 한자로는 죽곡竹谷이라고도 한다. '화목서 의성까지는 두어 시간만 걸으면 닿지요. 의성여중을 다녔는데 자취방이 있던 상리까지 주말이면 걸어 다녔어요.'권정생의 한 살 맏이 외사촌 누나인 안노연(1936년~)씨의 증언이다. 대체로 걸어 다니던 시절의 화목 사람들 이야기와 시간 감각이 비슷하다. 그러나 실제 걸어본 결과 다섯 시간 정도 걸린다. 아무리 걸어 다니던 시절의 사람들 걸음이라고 해도 두어 시간은 무리다. 몽실이가 밀양댁이 죽고 나자 외롭게 살고 있는 영득, 영순이를 보러 노루실에서 댓골까지 하루 만에 다녀오기도 하는데 소설 속의 이야기다.

댓골은 권정생이 1946년 봄 일본에서 돌아와 몽실이 처럼 '일본 거지'로 1년 반 정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외삼촌인 안반석安盤石이 살고 있는 외가에 의지한 것이다. 권정생은 이 곳에 있는 화목국민학교를 일 년 반 정도 다녔다. 오랜 벗이었던 이오덕(1925~2003)은 이때화목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직접 가르치고 배우지는 않았다. 권정생의 등단작 「강아지 똥」이 인연이 되어 1972년 처음 만나 교분을 텄지만 인연의 싹은 여기서 튼 셈이다. 이오덕의 생가는 권정생이 살던 곳에서 지척에 있다. 몽실이는 댓골에서 두 해를 살았다.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 영득이가 태어나던 해 새아버지의 폭력으로 절름 발이가 되었다.

이후에도 새아버지와 할머니의 구박은 끊이지 않았다. 몽실이가 댓골에서 두 번의 봄을 맞이했을 때 고모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 품으로 돌아간다. 몽실 나이 아홉살이었다. 화목재(화목 사람들은 사곡재를 이렇게 불렀다)를 넘어 의성 사곡마을을 가로질러 의성역에서 차를 타고 운산역에서 내렸다. 고모는 살강마을 쪽으로 가지않고 반대 방향으로 몽실이를 데리고 갔다. '아버진 이제 살강에서 살지 않는다. 엄마가 도망쳐 버렸는데, 거기서 창피해서 살 수 있겠니?'(『몽실 언니』, 51면)새로 옮겨 앉은 곳은 노루실이었다. 이곳에서 몽실은 한국전쟁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는다.
 

▲노루실에서 댓골까지 몽실이가 오고간 길 ⓒ안상학

 

노루실
'노루실 마을은 비스듬히 비탈진 산자락에 모여 있었다. 그 비탈길을 빙 둘러 안쪽 끄트머리에 정씨네 조그만 집이 있었다. 마을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정씨가 손수 돌담을 쌓아 지은 집이다.’(『몽실 언니』, 52면) 노루실은 일직면 운산장터에서 남쪽으로 5리 밖에 있다. 망호리의 폐교가 된 일직남부초등학교(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819)가 있는 골짜기다. 학교가 있는 왼쪽 마을이 노루실이고 오른쪽 마을은 비내미다. 김용락(시인)은 권정생으로부터 ‘노루실은 비내미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루실이 비내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골짜기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각기 다른 마을이다. 노루실의 실제 지명은 노래골이다. 말하고 듣기에 따라서는 노루골로도 통한다. 권정생이 작품 속에서 골을 실로 바꾼 것이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위치한 노루실에 일직남부초등학교가 있는 것도 인연이다. '깡통을 들고 장터 마을로 갔다. 신작로를 걸어서 오릿길을 가야 한다.'(『몽실 언니』, 211면)는 장터 마을은 일직면 운산리 운산장터를 말한다. 노루실에서 딱 2km다. 기차 정거장이 있는 마을로 자주 나온다. 어린 난남이를 데리고 밥을 얻으러 다닌 곳이다. 노루실과 댓골마을은 『몽실 언니』의 주무대다.

노루실은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아버지와 새어머니 북촌댁, 이복 여동생 난남이와 살았던 곳이다. 댓골은 새아버지와 친어머니 밀양댁과 성이 다른 두 동생 영득, 영순이가 살았던 곳이다. 몽실이는 어린데다가 장애까지 있는 몸으로 노루실과 댓골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살았던 소녀가장이었다. 가끔 나오는 까치바위골과 삼거리는 노루실에서 가깝다. 삼거리(소호리)는 노루실 북쪽에 닿아 있고 까치바위골(마을사람들은 깟바우골로 부른다)은 노루실 동쪽야트막한 고개 너머에 있다.

노루실에서 삼십 리 밖에 고모집이 있었다는 개암나무골은 아직 미상이다. 이 지명 역시 살짝 비틀었을 가능성이 크다. 권정생은 지명과 인명을 살짝 비튼 이유에 대해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름과 지명을 그렇게 한 것은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노루실 인근에 개암나무골이라고 짐작이 되는 곳으로 개암골(행정명칭으로는 광음리)이 있지만 아직 더 조사해봐야 한다.

부산 메리놀병원
몽실이에게는 친 할머니 같은 존재가 장골할머니다. 북촌댁 해산바라지에 손을 걷어붙였으며 난남이 젖동냥도 앞장을 섰다. 굶고 있는 몽실이에게 식모살이도 주선했다.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었으며, 밀양댁의 부고를 전해주기도 했다. 부상으로 신음 중인 몽실이 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는 자선병원도 소개해 주었다. 몽실이에게는 '언제나 좋은 소식을 쫓아와 알려주는 장골할머니(『몽실 언니』, 238면)'는 큰 의지처가 되었다. 택호인 장골은 노누실에서 남서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의성군 단촌면 장림리에 있다.

1954년 봄이었다. 장골할머니의 소개로 다리를 다친아버지를 모시고 '4년 전에 독일 천주교인들이 세웠다는 자선병원(『몽실 언니』, 240면)'을 찾아서 부산으로 갈 때 몽실 나이 열네 살이었다. 절름발이 몽실이가 다리를 심하게 다쳐 잘 걷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낯선 항구도시로 소문만 믿고 찾아간 것이다. 1953년 열차시간표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당시 운산에서 부산까지 여덟 시간 정도 걸린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선 운산역에서 오전 8시 53분에 출발하여 경주역에 낮 12시 8분에 도착한다. 여기서 동해선(현재는 동해남부선)으로 갈아타고 낮 12시 30분에 출발하여 오후 4시 35분에 부산역에 도착한다. 시간표에서는 정확하게 일곱 시간 사십이 분 걸리는 셈이다. 물론 시간표 상이다. 당시 증기기관차였으므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연착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장골할머니가 알려준 자선병원은 메리놀병원이다. 권정생은 1970~80년 초반에 사용한 작품 구상 노트에 ‘메리놀병원 1950년 4월 15일 개원'이라고 적어두었다. 작품 속에서처럼 ‘4년 전에’ 세운 병원은 메리놀병원이 유일하다. 권정생은 여기서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메리놀수녀회는 미국 외방 선교 수녀회인데 거기까지는 미처 조사하지 못한 것 같다. 독일계는 성 베네딕도수녀회가 1951년 11월 15일 세운 성분도병원(부산시 동구 초량동 1-9)이다. 시점으로나 시설, 정황으로 비춰보면 메리놀병원이 맞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의 수가 늘어나 새벽부터 병원문 앞에서 지금의 국제시장까지 진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릴 지경이었다. 이에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1시 두 차례에 간호사 수녀들이 병원 밖으로 나가 환자들에게 표를 나누어 주었다. 중환자에게는 우선권이 주어졌으며 특별표를 가지 사람과 이미 진찰표나 투약표를 가진 사람이 그 다음 순으로 진료를 받았다.'(메리놀병원오십년사 편찬위원회, 『메리놀병원 오십년사』, 2001, 17면)메리놀병원을 설립할 당시에는 부산시 복병동 81-8번지(현 중구 대청동 4가 81번지)에 있었다. 현재 부산가톨릭센터가 있는 자리다. 현재 메리놀병원(중구 대청동 4가 12번지)은 이곳에서 중구청 방면으로 500m 떨어져있다.

몽실이가 부산을 간 시점에 소년 권정생은 부산에 살고 있었다. 1953년 3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안동에서 곡물상회 점원으로 일하다가 그해 겨울 부산으로 내려가서 1957년 2월 귀향할 때까지 만 3년 남짓 살았다. 수정동의 고관삼거리 근처에 있는 이모 안순금安順今의 집에 살며 이종사촌 형 강대송姜大松(1925~1985)씨가 경영하는 <동화미싱>에서 일을 했다. 공장은 초량동 43번지에 있었다. 집과 공장까지는 600m 정도 가까운 거리였다. 당시 권정생은 어린 생질 강석훈(1951~)을 업고 출퇴근을 했다. 훗날 권정생은 재봉틀을 잘 다루기로 동네에 소문이 났었다. 이때 배운 기술이기도 하지만 형제들 중에서도 유난히 손이 맵고 꼼꼼하였다. 옷을 짓기도 하고 수선도 잘하였다. 한때 동네 수선감은 언제나 권정생 손을 거쳤다.
 

▲1950년대 메리놀병원이 있던 자리

 

동화미싱이 있던 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메리놀병원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부상병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의 부상과 질병을 도맡다시피 진료를 하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크고 작은 화재들이 국제시장(53. 1. 30), 부산역(1953. 11.27), 부산진(1954. 4. 4), 중앙초등학교(1956, 10, 23)에서 잇달아 일어나 응급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진료는 언제나 메리놀병원과 병원에서 파견된 현장진료소의 몫이었다. 같은 시간대에 근처에서 살았던 권정생은 이런 정황을 환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부산의 상황을 병원 풍경을 묘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이다. 몽실이 아버지 정씨는 병원 앞에서 줄을 선 지 열엿새만에 현관을 코앞에 두고 숨을 거둔다. 권정생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이기도 한 소년소설 『몽실 언니』는 1981년 강원도 삼척군 원덕읍 축천 2리(현산양리)에 있었던 <화가교회> 청년회지에 3차례 연재되었다. 당시 담임으로 있었던 김영동 목사(감리교)는 '지면이 마땅치 않았던 당시에 권정생 선생께 글을 쓸수 있는 동인을 제공하고 약간의 원고료 성격의 후원금을 드릴 빌미삼아 연재하다가 기독교관련 잡지인 『새가정』에 지면을 확보하고 선생의 원고를 타이핑하여 넘겨주었다'고 말했다.

권정생은 『점득이네』(1998, 12쇄, 5면) 서문에서 '김영동 목사님이 만들던 교회 청년 회지에 연재'했다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실 언니』 서문에서는 '울진에 있는 조그만 시골교회 청년회지'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울진이 아니고 삼척이었다. 아마도 그즈음에 가까운 사이인 이현주 목사(감리교)가 울진 <죽변교회>(1975~1981)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현주와 김영동 또한 같은 신학대 출신으로 권정생과 교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어쩃거나 이 소설은 『새가정』에 1982년 1월부터 1984년 3월까지 연재 되었다. 인민군을 다룬 부분이 문제가 되어 삭제되는 등 산고에 진통이 많았다. 1천 매 분량이 7백매 정도로 줄어든 ‘절름발이’ 그대로 1984년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2001년 발간된 양장본을 포함해서 현재까지 판매 부수 100만부를 훌쩍 넘겼다.

* 본 글은 『기록창고』 8호에 수록된 내용이며 E-book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안상학(시인)
2020-12-01 오전 10: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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