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창고

경북기록문화연구원

더불어 사는 삶의 힘
오늘의 기록은 내일의 역사

스토리 아카이브

홈으로 > 스토리 아카이브 > 기록창고
기록창고

문화공간탐방 '같이 가볼까'⑤-모스크바에서 우붓으로 가늘 길, 가일서가

  • 신준영(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 2020-09-17 오후 1:31:38
  • 2,440
  • 메일
속으로 가만 불러보면 어느 사이 마음이 뜨거워지는 지명들이 있다. 원촌, 내앞, 하계, 부포, 오미, 가일 같이 항일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안동의 대표적 마을 이름들이 그렇다. 그중에서도 풍천의 가일마을은 권오설, 권오직 형제를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 많아서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리기도 한 마을이다. 권오설의 '철관'을 떠올리면 가일마을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선명해진다.

지난여름 지인으로부터 이 마을의 '노동재사魯東齋舍'에 서가가 꾸려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촌한 젊은 부부가 의욕적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SNS를 통해 '가일서가'가 준비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9월에 문을 열었으니 백일 즈음 되면 어느정도 운영의 윤곽이 잡혔겠다 싶어 서가를 방문하기로 했다. 마을 입구에서 검은 리트리버와 동네 산책에 나선 부부를 마주쳤다. 단번에 그들이 오늘 만날 서가의 주인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김현정 씨와 이가람 씨는 80년생 동갑으로 3년 전 서울 생활을정리하고 김현정 씨의 본가가 있는 예천 가까운 곳으로 귀촌했다. 현재 김현정 씨는 문화예술 연구원으로, 이가람 씨는 외국 화장품 회사의 국내 에이전시를 대행하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에겐 여섯 살 된 딸이 하나 있다.

김현정   어차피 저희 일은 어디에 있든 컴퓨터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고 시골에서 애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시골이라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책을 마음대로 접할 수 없는 거였어요. 요즘은 서점에 가도 사운드북이니 뭐니 장난감이 너무 많아서 아이가 책을 못 고르는 거예요. 우리 딸이 책을 진짜 좋아하는데 딸이 직접 책을 골라서 읽을 수 있도록 뭘 좀 했으면 좋겠다 싶어 책방을 생각했어요.

그들은 서가에 '글 쓰는 책방 가일서가'라는 콘셉트를 붙였는데 나름의 이유가 있다. 서가를 계획하고 있을 때 예천 호명의 오천공소와 갈전의 갈전공소가 합쳐지면서 신도시에 갈전성당이 생겼다. 신부님의 권유로 사라진 갈전공소의 스토리를 김현정 씨가 인터뷰하고 집필하게 됐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스토리고 역사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인생 이야기로 책 한권쯤 남길 수 있는 삶이면 좋겠다 싶었다. 자연스럽게 글쓰기와 책방을 접목시켜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한 달 간 봉사활동처럼 취재한 결과물로 갈전성당 이야기는 단행본으로 출간 되었다. 처음에는 할 얘기가 뭐 있냐며 부끄러워하던 어르신들이었지만 막상 풀어내자 잊히기에는 아까운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현정   동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요. 누군가가 기록해줄 수도 있고 본인이 직접 기록할 수도 있는 그런 공간이 바로 여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남기고 모아두면 기록으로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은 여기 와서 자연스럽게 도서관처럼 책을 읽고 또 여기가 250년 가까이 된 공간이니까 비일상적인 공간의 힘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또한 새로운 경험이 되겠지요.

두 사람은 책방 기획안을 들고 소산마을을 비롯해 주변의 여러 빈집을 찾아다녔다. 그중 인연이 닿은 곳이 가일마을이다. 가일마을은 안동권씨 집성촌이고 서가가 들어선 노동재사는 안동시 문화유산 제25호로 문중에서 관리하는 곳인데 마침 오래 비어 있었다.
 

▲ 가일서가 내부전경(ⓒ백소애)

 

김현정   권종만 종손이 저희 기획안을 보시고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집은 사람이 살아야지 오래 비워두면 무너진다 하시면서요. 올 여름 3개월 간 인테리어하는 지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남편이 직접 일했어요, 비용 절감을 위해서. 썩은 거 긁어내고 벽지 걷어내고 마당의 돌 하나하나 새로 다 깔았어요.

현재 가일서가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가지다. 글 쓰는 일이 직업이기도 한 김현정 씨가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과 함께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그 하나다. 논술학원이 아니므로 글쓰기를 가르칠 생각은 없다. 누군가가 더 많이 배웠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들 안에 내재된 것을 스스로 끌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두 달 간 여섯 명이 함께 글을 쓰고 그 결과물로 책 한 권씩이 나왔다. 가일서가에서 발간한 첫 책이다.
 

 ▲두 달간 6명의 아이들과 함께 한 글쓰기 작업물을 단행본으로 만들었다.(ⓒ김현정)

 

김현정    아이들이 쓴 글만 가지고 에세이나 시집 같은 느낌이 나도록 디자인도 전문 디자이너에게 맡겼어요. 성탄 전후에 출판기념회도 할 예정이에요. 요즘 아이들이 영상물에 의존적이잖아요. 좋은 콘텐츠를 영상 물로 보는 것도 효과적이긴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게 걱정스러워요. 제 아이 뿐 아니라 아이의 친구들도 함께 잘 커야 모두 같이 행복할 수 있잖아요. 한쪽에만 너무 빠져있으면 같이 놀아도 대화가 없지 않겠어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이가람 씨가 화, 수, 목요일 저녁에 한 시간씩 진행하는 영어책 같이 읽기이다. 《해리포터》와 《라이프 오브 파이》를 읽고 있는데 나이 제한을 두지는 않았다. 돌아가면서 읽고 중요한 표현과 뉘앙스 같은 건 영어전문가인 이가람 씨가 설명해 준다.

서가가 문을 연 후 3개월간은 시범운영 기간으로 정했고 내년의 운영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 고심 중이다. 관광지처럼 다녀가는 사람들도 있고 책 구매보다는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있다. 내년에는 연령대별로 나눠서 '자기 삶의 기획'이라는 타이틀로 글쓰기를 해볼 생각이다. 영어책 읽기, 소소한 낭독회도 진행할 계획이다. 우선 1월 14일~19일까지는 만화가 황미나 작가 초대전이 예정되어 있다. 황미나 작가는 40~50대면 다 알만한 작가로 내년에 데뷔 40주년을 맞는다. 황미나 작가의 만화책 전시를 비롯해 1박 2일 캠프 겸 사인회도 가질 예정이다. 그림책 작가를 초대해 아이들과 그림책 만들기도 구상하고 있다. 내년에는 보다 다양한 활동이 가능할거 같다.
 

 ▲영어책 같이 읽기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백소애)

 

출산 후에 김현정 씨는 프리랜서로 서울시의 문화예술연구원 활동을 주로 해왔다. 문화예술을 기획하면 기록에 관한 부분이 반드시 포함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마을 단위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기회가 되면 어르신들을 모시고 각자의 동네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가일마을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그렇다.
 
이가람    옛 사람들이 옆에 노동서사魯東書社에서 공부하고 여기 노동재사에서는 기숙을 했어요. 이 대청에 앉아서 달 보고 별 보며 독서도 하고 사색했겠죠. 권오설 선생이 노동서사에 원흥학술강습소도 세워서 강습하셨고요.

한적하던 마을에 아이들 소리가 다시 들려오니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서가 표지판을 세우기 전에는 서로 내가 안내했다고 할 정도로 마을 사람들은 서가에 대해 호의적이다. 여름 내내 무며 배추며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고 책 팔아서 벌이가 되겠냐며 걱정도 해준다. 외진 데서 장사가 되겠냐고 소작 할 땅을 주겠다는 이도 있다. 개관식 때도 내 일처럼 참여해서 떡을 나누고 축복해 주었다. 동네에 이런 공간이 생겼다고 자랑할 겸해서 손님이나 친척들을 모시고 오기도 한다. 한마디로 가일서가는 동네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된 셈이다.

가일서가는 따로 음료를 판매하지 않는다. 음료를 같이 팔면 책에 대한 관심이나 집중도가 희석될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또 책방을 찾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싸게 구입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정가에 책을 사러 오는 것이라 생각해서 차 한 잔은 그냥 대접한다. 물론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책방을 시작한 취지가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하는 것과 동네에 찾아가고 싶은 책방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거였으니 카페가 아니라 책방의 기능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가람   돈이라는 목적을 따라가다 보면 저희가 추구했던 인문학적 가치들이 다 사라져 버릴 거예요. 저희는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책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 그 원칙을 지키고 싶어요.

김현정   이러다가 내년에 커피 팔 수도 있어요. (웃음)
서가에 꽂힌 책은 대략 150여 권 정도다. 초반 책 선정기준은 자연과 벗하여 사는 시골의 삶, 낙향으로 잡았다. 거의 한 권씩만 비치해 두었고 2~3주에 한 번씩 입고하는데 회전률이 빠르다. 김현정 씨의 취향이 많이 들어가있다. 아이들 책은 동화작가 두 사람의 추천도서 목록을 받아서 겹치는 수상작 위주로 선정했다. 어른들 책은 인문, 시골의 삶, 핸드메이드 카테고리로 입고했는데 최근에는 내 집 서가에 꽂아놓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책들로 선정하고 있다.

김현정    저희 삶이 일종의 실험인 거죠. '이렇게 살면 돼'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 이렇게 사는 내 삶을 보여주는 거죠. 나중에 제 딸도 누군가에게 고용되는 삶이 아니라 자주적인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딸과 시간을 충분히 보내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가람   한국에서는 여성상이라는 것에 대한 강조가 재차 필요하거든요. 저희에게는 딸이 하나 있고 아내는 또 딸의 엄마예요. 일반 사람들이 거치는 생의 스테레오타입 즉 대학 나와서 직장 가고 결혼하고 아파트 모기지 갚다가 자식 결혼하면 작은 집으로 옮기고 나이 들어서 죽음 맞이하는 거,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이렇게 모험하지 않으면 딸에게 원하는 삶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줄 수 없을거 같아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매달 모험을 하고 있고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있다면 그게 책이라고 봤어요. 그래서 이 사람과 제가 용기를 내서 아이에게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거예요. 책도 많이 읽게 하고 여성으로서 관습적으로 규정된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해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저희 집에서는 제 아내가 중심인거죠. 저는 여성상을 지키기 위해서 도와주는 부분인 거고. 그러면 딸이 단순히 동성의 엄마를 보고 크는 거 외에도 책을 보고 사색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글로 표현하고 자기와 대화하면서 성장하게 되겠죠. 저희도 겁나고 두렵긴 하지만 매달 모험을 해가면서 용기를 내는 거죠.

그들은 문화예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서가가 하나의 플랫폼이 되길 희망한다. 장기적으로는 마을 자체가 프리랜서들의 성지인 발리의 우붓Ubud*과 같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꿈도 꿔본다. 이 마을 자체를 작가들의 성지로 만들어야겠다는 장기적인 포부, 이 천혜의 자연에서 글을 쓰고 머무는 경험을 누군들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다. 일반인들도 작가들도 이 마을 어딘가에서 자리를 잡고 글을 쓰다가 갈 수 있는 그런 곳. 그들은 작가들이 레지던시하는 마을이 비전이 있는 마을이라고 생각한다. 병곡 권구 선생의 학덕을 기려 창건한 서원과 그에 딸린 재사에 자리 잡은 글 쓰는 책방은 가일마을 자체의 정체성과도 부합된다는 생각이다.

이가람    이곳이 지행知行을 실천할 수 있는 곳이되면 좋겠어요. 저희가 운이 좋아서 주변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이 마을에 자리 잡아서 참 좋아요. 살다가 해맬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지만 저희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저희만의 방식으로 서점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열심히 얘기를 하고 있죠.

20대에 김현정 씨는 많은 경험들을 해보고 싶어서 다양한 일들을 했다. 20대를 마무리하면서는 일반인들이 하는 직장 생활도 해보자 싶어 대우가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3~4년 근무했다. 얽매이는 걸 싫어해서 다른 사람들은 10~20년 직장 생활을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니 편해졌다. 모든 생활이 익숙해졌다. 취미생활 하고 새 옷 사 입고 시간 되면 퇴근하고 월급과 상여금이 정기적으로 들어오고 돈이 쌓여갔다. 재미는 있는데 어느 날 '아, 이렇게 살다가는 나도 10~20년 직장생활 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무서워졌고 그렇게 사표를 냈다. 때로 사표를 품고 있는 지인들에게 과감하게 그만두라고 얘기할 때도 있는데 상대는 남의 일이니 쉽게 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였다. 현정 씨는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서 가면 된다, 인생은 지그재그라고 진심에서 나오는 말을 해준다고

김현정    이제는 지인들이 한 번씩 다 다녀갔어요. 제 사는 모습이 그들의 삶에 분명히 영향을 끼치는 거라 생각해요. 이렇게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야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요?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사니까 문제가 생기지 않나요? 여기가 어떤 공간이 되어야 사람들에게 좋은 곳이 될까 늘 고민해요. 우리가 이 공간을 잘 살려놓고 가야 할텐데 하고요. 10년간 장기 임대를 했어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 공간을 정의 내리는 게 아니라 오시는 분들이 원하는 공간으로 만들어보자 하는 생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거예요. 십년 후에는 여기가 마을 도서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희는 책을 기증하고 공간을 돌려주고 떠나는 걸로요. 안동의 모스크바로 시작해서 안동의 우붓까지 짧은 시간에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듯 광대한 두 사람의 내면 풍경을 읽어낸 느낌이다. 가일마을에 깃든 가일서가, 이름처럼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 거기 있다. 십년 후의 가일은 어떤 모습일까 함부로 상상해본다.

* 본 글은 『기록창고』 5호에 수록된 내용이며 E-book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준영(이육사문학관 사무차장)
2020-09-17 오후 1:31:38
11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