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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약속 특별판 <영남의 어른⑤>-지란지교를 꿈꾸는 시인 유안진

  • 강병규(안동MBC PD)
  • 2020-09-16 오후 3: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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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웬만한 여고생들은 누구나 외우고 다니는 시가 있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친구를 만나고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어 온 즈음인 중·고등학교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한다. 친구의 소중함, 인연의 가치를 다시금 새기게 했던 시. 바로 '지란지교를 꿈꾸며'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는 행운의 네잎 클로버나 빨간 단풍잎을 코팅해 놓은 책받침, 혹은 책상머리 한쪽을 장식하곤 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휩쓸었던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지금을 사는 중년 누구에게나 있다. 아직도 고향과 친구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작가 유안진 시인을 가을 내음 물씬 풍겨나는 방배동 성당에서 만났다.

 

성당이 아담하고 예쁩니다. 이곳에 다니신 지 오래되셨습니까?
원래 이 성당을 다녔어요. 잠실에 살다가 너무 멀어서 좀 가까이 왔죠. 그때 와서 이 동네에 38년째 살고 있습니다. 이 성당은 지은 지 35년쯤 됐어요. 그러니까 여기가 길에서 동사하는 노숙자들, 행려사망자들의 시신안치소였어요. 그래서 아무도 이 땅을 건드리지 않았는데, 천주교에서 이 터에 성당을 지었죠. 지은 후 처음부터 여기를 다녔구요.

 

신앙생활을 하신 지도 꽤 오래 되셨겠네요?
뭐, 오래된 햇수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제대로 믿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죠. 예전에는 설렁설렁 믿었었는데 제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의지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옛날에 제가 대학 입학시험을 칠 무렵이었는데 할아버지께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시집보낸다고 그러셨어요. 도망치려면 대학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그때 성경 신·구약 다 읽고 의지하게 되었죠. 그러다가 결혼하고 애들 낳고 키우면서 아이들이 아플 때, 걔네들이 또 학교 가고 그러던 때도, 남편이 떠나고 나서 제가 혼자 남아 너무 힘드니까, 퇴직하면서 시간이 많이 좀 생기니까 자꾸만 찾게 되더라구요. 어려울 때에 더 가까워지고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신은 부모니까, 부모가 어떻게 자식을 잊어버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신이 저의 부모님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작가님 고향이 임동 박실로 유교적인 전통이 강한 곳이잖아요. 외국에서 온 신앙을 접하는 게 괜찮으셨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를 하시면서 기독교 신앙을 접하셔서 임동 챗거리 장터에 있는 초가집으로 된 교회를 다녔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으로 이사를 갔는데 집 옆에 깡통을 펴서 만든 교회가 있었는데 거기를 또 다닌 거죠. 그리고 우리 민속을 보면 신들이참 많잖아요? 우리가 정신없이 밥을 먹으면 걸신 들렸냐고 하는데, 그게 객귀걸신, 문간에는 문신, 냇물에는 용신, 산에는 산신령, 대청마루에는 성주신, 안방에는 삼신할미, 부뚜막에는 조항신, 뒷간에는 측간신 같은 신들이 많잖아요. 사람들에게는 기복신앙이었던 거죠. 그런 것처럼 우리 민족에게는 신에게 의지하는 어떤 유전자 같은 게 형성되어 있지 않나 생각돼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저 역시 가톨릭 신앙으로 다가가게 된 거죠.

 

어릴 때 고향 동네 풍경이 기억나시죠?
참 조그만 마을이에요. 돌고개를 넘어 망천을 건너면 가시넝쿨 많은 큰 숲이 있어요. 그 숲을 지나면 거기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우리 마을 박실이에요. 고향말로 입새(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종택이 있고 큰댁이 있어요. 유난히 손님이 많았는데 손자를 기대했던 할아버지께서 어쩔 수 없이 큰 손녀인 저에게 천자문을 가르치셨죠. 손님들에게 자랑하시고 싶어서 그러셨던 것 같아요.

 

여자 아이를 저렇게 키워서 뭘 하느냐하는 분들도 계셨는데, 제가 그 당시 한글을 해독했기 때문에 천자문 책에 달려 있는 한글 토시를 줄줄줄 다 읽어내서 그랬는지 그게 그렇게 기특하고 좋아서 손님이 오시면 저를 불러내서 그 250수를 다 외우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손님들이 '그 아이 참 총기 있다' 하면서 대견해 하셨어요. 그런 걸 할아버지가 즐기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동몽선습 첫 구절인 '천지만물 중 인간이 가장 귀한 것은 오륜을 알기 때문이다'는 문장도 외우게 하셨어요. 나중에 유학시절에 할아버지께 배운 우리 고유의 민속 문화에 대한 이야기로 과제물을 제출해서 칭찬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 박실이 지금 추억을 하면 굉장히 소중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어머니의 가르침도 매우 엄했다고요
나는 그냥 뭐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처럼 그렇게 살았는데 어머니는 저를 키워서 좋은 집에 시집보내려고 애를 쓰셨죠. 현모양처가 되어야 하고 불천위를 지내는 집에 정경부인이 되어야 한다며 어렸을 적부터 굉장히 혹독하게 가르치셨어요. 친정에 보내는 편지를 저한테 쓰게 하시고, 제사상 차리는 것을 강제로 외우게 하셨죠. 홍동백서, 두동미서, 어동육서, 조율이시, 좌포우회 같은거 말이에요. 감과 배는 여성, 딸을 의미하고 대추랑 밤은 남자, 동쪽하고 남쪽은 남성의 방이고, 서쪽하고 북쪽은 여성의 방이잖아요. 그게 음양이 이렇게 조화를 이루어야 가장 최적의 평화로운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죠. 어렸을 적 어머니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제가 후에 민속을 공부하는데 좀 힘들었을 거예요. 그게 많이 도움이 됐다고 볼 수 있죠.

 

 ▲유안진 시인, 서울대 아동학과 명예교수. 1941년 안동시 임동면 박실 출생.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와 수필, 소설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강병규)

 

박실마을엔 언제까지 계셨어요?
초등학교를 거기서 졸업을 했어요. 마을에서 10리가 넘는 챗거리 장터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으니까. 근데, 제가 특히 몸이 허약해서 결석도 많이 했었죠. 우리 동네에서 나가서 큰 종택이 있는 무실을 거쳐서 원두들로 해서 챗거리 장터에 갔어요. 장날이면 장구경도 하고 집에 돌아오고 그러니까 뭐 놀고 다녔지 공부는 뭔지 몰랐어요. 챗거리 장터는 엄청 큰 장터였어요. 야바위 꾼들을 비롯해서 온갖 구경을 다했죠. 그런데 어머니나 젊은 여자들은 장에 못갔죠. 제물도 남자들이 장봐오고여자들은 마을 밖에 못 나갔어요. 뿐만 아니라 그 더운 여름에도 버선 신고 했죠. 완전히 조선시대 끝자락이었던 것 같았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는 바로 대전으로 가신 건가요?
네. 우리 외가에서 외숙들이 좀 개화를 했었는데 그 탓에 아버지께서 그냥 그쪽으로 옮기셨어요. 제 밑에 동생들이 태어나자마자 여럿이 죽어버렸는데 그때는 다 그랬죠 뭐. 그 충격이 컸던 아버지께서 대전 처가를 다니러 가셨다가 외숙들의 말을 들으셨죠. '언제까지 거기서 제사만 지내고 살거냐?'라고들 하셔서 그 말에 그만 대전으로 옮기게 되었죠. 당연히 제가 따라가게 된 것이구요.

 

고향 박실마을과는 많이 달라서 적응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고향과는 너무 비교가 되는 거죠. 거기서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국회의원 소실의 딸도 있고 변호사 딸도 있고 그랬죠. 그때 저는 변호사란 직업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술도가, 양조장집 딸도 있었고 다 잘사는 집이었는데 우리는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죠. 시골에 있을 때야 무실 앞을 지날 때 주위에 어른이 아버지 함자를 부르면서 “너 익기 딸이지?”, “니가 친서 할배 증손주냐?” 뭐 이런 식으로 다 알아줬었는데 대전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요. 고향에서는 차별대우 받는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대전에서는 완전히 촌 기집애하나가 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선 뭐 못하는 것도 많았죠. 음악 악보는 뭔지도 몰랐죠, 수학도 못했죠. 그나마 외우는 것은 소질이 있었으니 그걸로 겨우 보상을해나갔죠 뭐.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좀 따라가셨어요?
그나마 좀 나아졌었죠. 여고시절 그때는 어머니나 우리마을 전체 부녀자들이 가사를 많이 외웠어요. 안동에는 내방가사하시는 분들이 좀 있지요? 화전가, 친정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사친가, 같은 동네서 같이 자랐는데 시집은 각각 다른 동네로 가니까 그때 그 꼬맹이 적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오가 같은 내방가사를 많이 외우고는 했죠. 우리도 따라하면서 울기도 하고 그랬어요. 감성이 그렇게 풍부했었죠. 아마도 그런 것들이 제가 소월 시집을 읽으면서 문학으로 와 닿는 토양이 되었던것 같아요. 전쟁 직후 손수레에 책을 꽂아놓고 빌려주던 책방, 이동식 책방이 있었어요. 학교 동급생들이 사투리 쓴다고 흉보고 그러니까 가슴에 맺히던 때였어요. 친구도 별로 없고 외로우니까 그 아저씨가 소월시집을 빌려 주길래 하룻밤에 다 외워버렸어요. 소월 시에 보면 산유화에 가을,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이런 구절이 있어요. 그런데 왜 가을이 아니고 '갈' 이라고 했는가 싶더라구요.

 

엄마나 할아버지처럼 촌스러운 말이 '갈'이었던 거죠 여고생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어요. 가을보리를 '갈보리'라고 하잖아요? 봄보리, 갈보리 그러는데 그런 궁금증을 선생님에게 질문으로 던졌죠. '원래 계절의 순서가 봄, 여름, 가을인데, 시는 왜 갈, 봄뿐이고 여름은 없는 것이냐?' 뭐 그런 걸 선생님한테 물었었죠. 그런데 선생님이 저한테 망신을 줬어요. 가만히 저를 보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녀석인데 이상한 질문을 하니까 귀찮았던 것 같아요. '소월이 그렇게 쓰고 싶으니까 썼지 뭐' 그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때 제가 콤플렉스가 있었죠. 모욕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두고 봐라, 내가 시인이 돼서 당신 앞에 나타날 테니까'면서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운동장을 뱅뱅 돌면서 다짐했어요. 저는 그걸 모욕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시라는 시는 몽땅 외워버렸죠. '시몬, 너는 좋아하니 낙엽 밟는 소리를'라는 프랑스 시를 한여름 그땡볕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달달 외웠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왜 문학 전공을 안 하신 건가요?
대학 가는 애가 워낙 적었으니까. 고등학교 3년 동안 저 혼자 이렇게 하면 대학을 가리라 생각을 했는데 법대를 갔던 선배가 내려와서 특강을 하는데 녹록지 않은 거예요. 법대가 사법고시도 있었구요. 그리고 학비를 댈 만큼 우리 집이 여유 있는 집안도 아니었어요. 마침 할아버지께서 저를 봉화 어느 집안으로 시집보내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제가 집에서 도망을 치려면 어디든지가서 합격을 해야 했고, 집에다 손을 안 벌리려면 등록금이 없는 데를 갔어야 됐지요. 그래서 등록금 없는 사범대학을 택하게 된 거였죠. 대학원에 가게 된 것도 역시나 할아버지 때문이었죠. 도망가는 길이 대학원 밖에는 없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저를 적극 지지해 주셨어요.

 

엄마가 당신처럼 사는 걸 싫어했으니까요. 콩나물 길러서 그 많은 제사 지내고 그렇게 그늘에서 희생하셨던 어머니는 내 딸이 그렇게 사는 것은 싫어하셨어요. 대학원에 문학을 전공하려고 박목월 선생님께 의논을 했어요. “국문과를 가려니 제가 그쪽을 안 나와서 선후배도 없고 스승도 없어서 너무 외롭습니다” 그랬더니 제 전공이 뭐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이놈아 그게 더도움이 된다. 시라는 큰집을 지으려면 그 공부를 해라” 그러시는 거예요. 국문과 가면 시 쓰는 기술만 배운다면서요. 그러니까 박목월 선생님은 도사예요. 제가 복이많아서 좋은 스승에게서 좋은 걸 배웠어요.

 

유학을 가신 이유도 역시 할아버지 때문입니까?
대학원 졸업하고 지방 대학의 교수 자리는 있었는데 제가 안 갔어요. 가면 제가 거기 주저앉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죽더라도 가야한다는 그게, 제 목표가 그것밖에 없었어요. 절박했어요. 할아버지가 재촉하셨던 경상도 남자하고 결혼, 어느 집에 며느리로 처박히지 않으려면 제가 할아버지를 떠나야 됐어요. 그때 중풍을 앓으셨는데 건강하셨으면 아마 난리 났을 거예요. 근데 저는 거기서 도망가느라고 풀브라이트 장학생 선발에 세 번 만에 겨우 합격해서 유학을 갔죠. 그런데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머니가 “박사학위 하고 온대요” 그랬더니, “박사?” 그러면서 좋아하시더래요. 그러니까 부모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끝없이 자손이 잘 되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그렇게 서양으로 가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했는데, 다시 천착한 것은 우리 것이었다고 들었어요.
우리 것이 오묘한 것이에요 그렇게. 우리 민속에 애 낳으면 금줄을 21일 간 치는 풍습이 있죠? 그 기간이 가장 위험한 시기예요. 신생아에게도 병이 전염될 수도 있고 위생이 말이 아니었잖아요. 산모도 출산하고 병이 가장 잘 걸릴 시기예요. 그렇게 위험을 알리면서 '출입을 삼가주십시오'하는 것이 금줄 거는 거예요. 그러면 친척이라도 방문을 자제하고, 아들이면 남근을 상징하는 고추, 붉은색은 또 귀신을 쫓는 것이고 고추 씨 노란 것은 황금을 말하는 거니까 부를 의미하는 거죠. 셋은 이게 절대 수에요. 그러니까 최소한의 남성 수와 최소한의 여성 수, 음수가 합한 것이 가장 평화로운 음양의 조화를 이룬 거예요. 그것이 셋이에요.

 

그리고 왼쪽으로 새끼를 꼬아요. 왜냐면 왼 방위는 귀신의 방이기 때문에 귀신이 인간의 방인 오른쪽으로 들어오려고 하다가 못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어디서 그런지혜를 얻었겠어요? 숙제할 때 일주일에 세 개의 리포트를 써서 제출하는데 그 소재가 모두 어릴 때의 경험이었어요.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8, 9세까지 도덕성도다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시골에서 얼마나 도덕적으로 엄격해요. 그것을 제가 열 두세 살 어렸을 때 이미 다 한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서툰 영어로 설명해서 리포트를 쓰니까 점수가 나온 거죠. 미국인 교수들이 그 문화를 몰라도 그냥 좋다는 거라, 그것이 논리적으로 맞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내 어렸을 적 기억이다, 내가 우물가에서 할머니들이나 마을 누구한테 들었다. 제삿날 집으로 온 친척들한테서 들었다, 동네에 명절날 들었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게 모두 인정이되는 거였죠. 그게 문화인류학이고 교육인류학이고, 종교인류학이고 그래요.

 

결국은 어렸을 때 그 경험과 학습과 생각 그 모든 것이 다시 발현이 된 거라고 보면 되겠네요.
네. 그걸 불러내서 음미하고 해석하고 그게 중요한 것이지 어렸을 때 배우고 잊어버리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평생 그것을 가지고 우려먹는 거라고 생각해요. 소설가 김주영 씨가 객주를 쓰면서 평생 어렸을 적의 경험을 불러서 그 대작을 썼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어릴 적에 인간의 모든 것을 다 형성을 했다는 거예요. 아동기가 그렇게 중요해요. 어쩌면 지금 사회에 가장 이슈가 되는 유치원 문제 있잖아요. 그것 역시 아동기가 중요하니까 그렇게 이슈가 되는 거죠.

 

옛날을 돌이켜 보면 손자들이나 동네 친척 아이들이 모두 할머니 치맛자락으로 모이잖아요. 이쪽 가면 이쪽 아주머니 댁 저쪽에 가면 뒷집 할매 이렇게 할매 댁이 있잖아요. 그분들이 다 유치원 교사였고 원장이었어요. 그래서 그걸 제가 무릎학교라고 그랬어요. 대가족이 사니까 할머니들이 손주들이 배가 아프다고 하면 '니 배는 똥배 할미 손은 약손'하면 그게 순 심리적인 치료지 뭐 병이 낫는 건 아니잖아요. 우린 마음이 인간을 결정하잖아요. 그래서 자꾸 긍정적인 얘기를 하라고 하잖아요. 그래, 나는 잘 될 거야. 그래, 시험 잘 칠거야 하면서 내보내면 걔는 잘 한다고요.

 

이야기를 다시 문학 쪽으로 돌려보죠. 박목월 선생님한테 편지를쓰셨다고 했는데 용기가 나셨어요? 무슨 이야기인가요?
옛날에 박목월 선생님 백일장에서 내가 떨어진 적이 있어요. 선생님이 심사평을 할 때, 내 시구를 가지고 자꾸 얘기를 하셨어요. 근데, 그때는 그게 선생님이 칭찬을 했다고 생각을 했지 지적이라고 생각이 안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선생님이 나를 기억할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바보지. 그리고서 '선생님, 저 기억하실지, 기억하시겠지요.'하면서 그렇게 용기를 내서 편지를 썼다고요. 생각해보면 선생님께 그런 학생이 나만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엽서가 왔어요. '유 군, 시작노트 가지고 한양대 내 연구실로 놀러오게. 목월' 이렇게 썼어요. 그런데 또 바보같이 저는 '목월'을 '토월'로 읽었어요. 나중에 알아차리고 무작정 갔죠. 연구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지도 못하고 있는데 스포츠머리를 한 선생님이 나오시더니 휙 지나가시더라구요. 그냥 부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어요.

 

한참 후에 선생님이 다시 돌아오셔 서는 날 가만히 보더니 “자네가 유 군이가?” 그러더라고요. 그리고는 화신 뒤에 있는 유명한 이문설렁탕 집으로 데려가셨어요. 설렁탕을 두 그릇 시켜놓고 선생님과 마주 앉아서 먹는데 선생님이 소금을 설렁탕에다 집어 넣고 그 소금 그릇을 나한테 밀어주지 않았어요. 그러면 내가 그걸 가져와서 먹어야 되는데. 그게 용기가 안나는 거야. 그러고 있는데 선생님은 막 질문을 퍼붓는 거예요. 부모님은 계시냐, 뭐, 이런 것만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답하느라고 그 소금기 없는 맨 설렁탕을 먹는 둥 마는 둥했죠. 그때 선생님은 다 보셨던 거에요. '저 맨 설렁탕을 먹는 숙맥이니까 시는 곧잘 쓰겠다' 이렇게생각하신 모양이에요. 맨 설렁탕 먹은 덕분으로 선생님이 저를 예쁘게 보셨던 것 같아요. 스물 두 살 쯤 됐었죠. 그래서 선생님 댁에 가면 사모님보고 엄마라고 그랬는데 “엄마야, 저 맨 설렁탕 먹은 유 군 왔대이” 이렇게 얘기를 하시곤 했어요.

 

 

 

 

 

박목월 선생님은 작가님께 어떤 분이신가요?
참 잘 해주셨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제가 선생님 복이많았던 것 같아요. 중학교 2학년 때 소월 시에서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꽃이 피네' 이 구절을 가지고 선생님께 '봄, 여름, 가을 없이' 계절 순서대로 안 하고, '갈'이라고 사투리로 써도 됩니까, 라는 질문을 했었을 때 그선생님이 저한테 그렇게 망신을 안 줬더라면 시인이 된다고 안 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 복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선생님 댁에 인사를 갔는데 내일 학교로 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갔더니 저를 데리고 총장실로 학장실로 다니면서 내 제자가 박사 학위 해가지고 왔다고 자랑하셨어요. 참 감사했지요.

 

이제는 작가님 작품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잘모르겠지만 작가님 하면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아니겠습니까?
지란지교는 사실 《문학사상》의 땜통 글이에요. 학생들의 데모가 많았던 때였는데 그날 저녁은 어떻게 일찍왔어요. 밥을 하려고 하는데 저녁에 전화가 오기를 내일 아침까지 빨리 15매를 써서 갖다 주라는 거예요. 그때는 문예지가 《현대문학》하고 《월간 문학》하고 《문학사상》밖에 없었어요. 거기서는 한 번도 나한테 원고청탁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속상하고 괘씸하고 막 콤플렉스도 느끼고 그랬는데 땜통 원고였지만 거기서 청탁을 하니 밤 새워서라도 해줘야했죠. 그래서 꼬박 밤을 새워서 쓴 원고를 가지고 택시를 타고 종합청사가 있는 그 뒤 사무실 문 밑으로 봉투를 밀어 넣어주고 아침 수업을 갔어요. 그게 <지란지교를 꿈꾸며〉입니다. 우리가 뭐 권력도 갖고 싶고, 돈도 갖고 싶고, 명예도 갖고 싶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초라하니까 재력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소중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필요도 없고, 또 그것을 대단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그런 구절이 거기에 들어가요. 평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않는 매화처럼 또는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는, 멋을 잃지 않는 오동나무처럼이라는 구절도 나오고 뒤에 좋은 구절들이 많이 있어요. 무슨 뭐 이에 고춧가루가 끼더라도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늙었더라도 그 품위와 이런 것은 별개다. 그것으로 우리가 인생에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더 사랑하고, 이제 그렇게 살자, 하는 그런 뜻의 내용이 담겨 있죠.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도 유명하죠?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는 문학사상 회장이 무슨 얘기를 하다가 나온 이완용의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불가불가' 두 번 했다는 말 해석을 했는데 '불가불가'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제가 할아버지께 천자문 배운 것을, '아유, 나 할아버지한테 코가 꿰어가지고 어렸을 때 고생했어' 이렇게 해석을 안 하고 평생 그걸 우려먹으면서 좋게 기억하듯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달랐잖아요. 그런 우리 경험을 얘기했더니 그걸로 소설을 쓰라고 그러는 거야. 그러고는 그것을 문학사상 8월호에 광고를 해버렸어요. 유안진 씨 첫 소설 뭐 이러면서, 그렇게 저를 불러서는 '내가 이렇게 광고를 문학사상 8월호에 했기 때문에 9월부터 연재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제목도 안 나왔는데 그 양반 때문에 썼어요. 그래 생각해보니 유학다녀와서 한 십년 쯤 자료가 쌓였는데 소설 쓰기에 딱알맞았지요. 그리고 고향 마을이 수몰되려던 때였어요. 수몰이 된다니까, 떠나 사는 자에게는 고향이라는 것은 우선 아름답게 느껴지잖아요. 그것이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굉장히 상실감도 컸고 그랬죠. 그런 생각으로 글을 썼어요.

 

그 소설 제목은 어떻게 나왔어요? 그냥 듣기에도 굉장히 의미심장한데.
바람꽃이라는 것이 눈이 왔을 때에 제일 먼저 피는 꽃이에요. 그리고 땅바닥에 붙어서 키도 작아요. 근데 그때는 그 바람꽃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저는 없는 꽃을 만들어 낸 거예요. 그렇게 제목을 지었는데 나중에는 KBS에서 대하드라마로 만든 것이죠. 우리 민속의 풍속은 여러 성이 섞여 사는 데를 민촌이라고 그러고 외성 받이만 사는 데는 반촌이라고 그래요. 그 풍속에 대해서 올바르게 남길 필요도 있다 해서 그런 여러가지 다목적으로 작용을 했던 것 같아요.

 

바람꽃이 뭔지도 모르고 쓰셨다고 했는데 그 바람꽃의 의미를 잠깐 얘기해 주셨어요.
한국 여성들의 정신, 모성적인 정신, 품어 안고 사랑하고 껴안는 것이 상징이죠. 부인은 치마 자체가 열두 폭치마든 통치마든, 여성은 집안의 의사예요. 가정은 희망과 치료를 해주는 병원 자체죠. 가족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요. 그걸 제가 강조했는데,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꽃은 시들면 안된다 그러니까 시들지 않는다는 거죠. 한국의 모성이 별나잖아요. 부모는 용서하는 자이지 정죄하는 자가 아니에요. 물론 아버지, 어머니가 나쁜 건 나쁘다고 하면서 엄하게 키워야 돼요. 저도 어머니가 굉장히 무서웠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사랑하고 포용해주는 것은 어머니예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글쓰기 역시 작가님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도 되겠죠?
맞습니다. 자기의 경험, 성장기에 우리 부모님들이 나한테 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는 것, 그 다음에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진정으로 느끼는 것 뭐 이런 것들이 복합됐겠죠. 아무리 외국이 좋다고 해도 내나라가 제일 좋잖아요. 아무리 좋은 이부자리에 잘 먹어도 우리 집이라는, 말하자면 우리 어머니가 항상 뒷간 같아도 자기 집이 제일 편하다 그랬어요. 우리 집보다 좋은 데가 없잖아요.

 

그렇다는 것을 아이들이 깨닫게 해줘야 되는 거예요. 지고 돌아와도 이기고 나가거라 하는 곳은 집이고 가정이라고. 그런데 지금 그 가정이 붕괴되잖아요. IMF 겪으면서 가정이 붕괴되고 했지만 엄마가 있는 가정은 덜했어요. 엄마가 있는 가정은 금방 회복돼요. 이건 제가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연구결과가 그렇게 나와요. 여성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죠.

 

그 여성의 힘이 단군 할아버지를 낳은 곰 할머니로부터 내려오는데. 한번 잘 살펴보시면요 우리 신화에 고주몽을 키운 사람이 어머니 유화입니다 아버지 해모수가 아니고. 박혁거세를 낳은 사람이 사소라는 분인데 엄마는 아들을 잘 키워서 한 나라의 시조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가야국의 정현왕후, 수로왕의 어머니도, 백제 두 시조의 어머니도 소서노였죠? 만주 벌판에서 남으로 내려와서 두 아들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한 거잖아요. 그게 바람꽃의 정신이에요. 바로 엄마의 정신이고 모성이에요. 설명 불가능한.

 

입시경쟁에 몰린 아이들을 보면 참 짠한 생각이 많이 드실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지만 우리 인생에서 언젠가는 그런 가혹한 시기를 극복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을 극복 안 하고 편하게만 살면 아무 것도 안 된다고도 생각합니다. 계절에도 혹독한 겨울이 있듯이 우리 성장기에든지 어느 시기에든지 그런 겨울을 경험해야 돼요. 그러면서 강해지고, 지혜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극복했는데 하면서 그런경험에서 지혜가 생기고 면역력이 생기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요. 다 평탄할 수는 없잖아요. 인류역사에 위인들은 다 어려운 시기를 겪었어요. 그것을 아주 어려서겪느냐, 어른이 되서 겪느냐인데 어려서 겪는 게 좋아요. 우리 아이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겪는 거죠. 그러니까 저렇게 겪어서 강해지는 거예요

 

65년에 등단하셨으니까 50년이 넘었네요? 그런데 또 글을 내셨습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평생 쓰는 거죠.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게 가톨릭에서 영광송이라고 하는데 그 제목을 좋아해요. 우리가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 정월 초하룻날 그 마음을 일년 내내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러잖아요. 우리가 일생 처음 같이 항상 영원히, 이제와 항상 영원히, 이렇게 나오는데 그게 기도의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길지만 그렇게 붙였어요.

 

 

글쓰기는 선생님께 무엇입니까?
저는 나이가 들면 할 말이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에요. 평생 써도 써도 할 말이 있더라구요. 그런 글쓰기가 또 다른 종류의 바람꽃인 것 같아요. 저한테 있어야 할 그리고 저를 버티게 해주는 힘인 것 같습니다. 종교 다음으로 또 다른 묘한 힘이 그건 것 같아요. 신앙의 힘과 또 다른 세상적인 신앙의 힘, 그것이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또 쓰는 것 같네요.

 

석양이 지면서 약간은 쌀쌀해진 늦가을이었지만 유안진 작가의 이야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 번 나오면 그 곁가지가 무성히도 뻗어가는 말의 성찬이었다. 아직도 곱디고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지란지교를 꿈꾸는' 문학소녀 같은 감성으로, 때로는 우리 것에 대한 열렬한 애정과 확신으로 꽉 찼던 인터뷰를 겨우 끝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제작진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마련해 준 유안진 시인은 따스한 어머니였다.

 

* 본 글은 『기록창고』 5호에 수록된 내용이며 E-book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강병규(안동MBC PD)
2020-09-16 오후 3: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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