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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게 말을 걸다③-예천과 안동의 경계에 머물다

  •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2020-09-15 오후 3: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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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손에 이끌려 기차에서 내린 곳은 풍기역이었다. 소백산에서 세차게 훑어 내려온 늦가을 바람이 역 플랫폼을 휘감아 기운은 제법 쌀쌀했다. 우리 가족은 예천군 감천면 어느 산골짜기 아래 고향마을로 가는 막차를 기다렸다. 잠깐 친구를 만나 대폿잔을 기울이던 아버지는 끝내 막차를 놓쳤다. 아버지는 야심한 밤 풍기에서 예천 쪽 힛틋재를 넘으며 삼 십리 길을 걸어서야 동네로 들어왔다.

이튿날 큰집으로 가는 언덕길 우측 야산에는 햇빛을 머금은 채 바람에 뒤흔들리던 단풍이 우뚝했다. 1972년 늦가을 일곱 살, 아버지 고향 예천 땅과 조우한 기억은 스산하고도 쓸쓸했다. 82년 열일곱에 안동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후 매주 쌀 보자기와 김치통을 들고 34번 국도를 오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약간의 버스비를 아끼려고 태화삼거리에 내려 안기동 자취방까지 걸어 다녔다.

90년 4월, 군복무를 위해 예천공군부대 단기사병에 입대했다. 퇴근 후 낯선 읍내를 오가며 만난 청년들과 함께 청년운동을 모색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함께 민중사랑을 지향한다는 기조를 분명히 담기 위해 '민사랑 청년회'로 명명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으로 해직된 교사들과 접촉해 공동사무실을 꾸렸다. 초청강연회, 시사토론, 풍물패 활동, 문화답사를 주요활동으로 삼았다. 젊은 청춘들이 모였으니 술자리가 많았다. 자연스레 연애로 이어져 결혼으로 골인하는 커플도 종종 발생 했다. 작은 소읍에 농민회, 교사회, 청년회가 함께 어우러졌고, 진보적인 문인들의 글을 읽으며 지역을 재발견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90년 초, 경북북부권에는 안동사랑청년회, 영주민주 청년회, 점촌·문경터사랑청년회, 상주삼백사랑청년회, 예천민사랑청년회가 서로 교류하고 연대감이 높아졌던 시절이다. 이미 대구에는 새로운청년회가, 경북 남동부 권에는 포항민주청년회, 경주민주청년회, 경산민주청년회가 활동 중이었다. 이들 9개 지역단체가 연대해 대구 경북민주청년단체준비위원회를 꾸렸다.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로 소속된 대구경북민주청년단체협의회는 문화활동과 함께 지역대중운동으로 나아갔다. 민청련을 계승한 한청협의 활동 10년사가 99년 책으로 발간됐지만 내 서고에서 분실된 지 오래다. 90년 초반 예천성당에서 간부수련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을 했던 저 사진 속 청년들은 이제 사십대 후반에서 오십대를 훌쩍 넘기고 있지만 여러 영역에서 그때 첫 마음을 지키며 질기게 살아가고 있다.
 

 ▲90년 초, 한청협 산하 대구경북민주청년단체협의회 준비위 간부수련회를 예천성당에서 이튿날 남은 일행이 기념촬영을 했다.(ⓒ유경상)

 

지금 내 앞에 놓인 사진에는 그 이후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다. '예천문화예술단체연합회 창립 대의원대회'(93.12.1)가 치러진 사무실은 청년회 사무실이다. 어느덧 노년으로 접어든 분들의 젊은 날 모습이 보인다. 그때 민사랑청년회에선 '청년글방'을 운영했다. 요즘으로 치면 작은도서관이다. 안성준 한겨레신문 예천지국장과 함께 주민글방 운영사례를 알아보러 대구민들레교회를 방문했고, 해직교사가 운영하던 영주의 모 서점에 가서 1백만 원 안팎으로 새 책을 여러 번 사들였다. 기증된 책, 새 책이 모여 3천여 권으로 장서를 꾸몄다.
 

 ▲예천민사랑청년회 사무실에서 개최된 예천문화예술단체연합회 대의원대회(ⓒ유경상)

 

한 번씩 예천에 일이 있을 땐 4차선으로 바로 가지만 돌아오는 길은 늘 예전 국도 34호선으로 접어든다. 이 길은 추억을 불러오는 정겨운 길이다. 2008년 신도청 유치에 성공하고 3년쯤 지났을 때쯤이다. 2차선 옛 도로를 달리다가 문득 '이 길을 예천·안동 주민들의 공동 마라톤 코스로 활용하면 참 좋겠다'고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풍산읍을 지나 안동교도소 앞 상리리에서 도로는 끊겨져 있다. 마치 2008년 경북신도청을 합심해 유치 성공을 해놓고도 이후 신도청 도시건설을 둘러싼 발전방향과 비전에서는 서로 다른 모습을 연상시킨다. 다른 곳을 바라보는 듯한 두 도시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한다. 상생의 협력을 갈구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두 도시의 변방화는 불보듯 뻔히 보이는데 답답한 시간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안동대 탈반 덧뵈기를 초청해 한천 부지에서 행사를 하기 앞서 고사를 지내는 모습. 고사를 지내는 오른쪽부터 김두년(전교조 교사). 이계동(민사랑청년회장), 안성준(한겨례신문 예천지국장), 필자의 익살스런 표정이 지금 봐도 정겹다.(ⓒ유경상)

 

지난 9월 중순 안도현 시인이 주도하는 사단법인 '모 천母川'에서 창간할 《예천산천》 편집회의에 갔다. 누구는 돌아오기 위해 애쓰고 다수는 떠나려고 아우성이다. 내성천을 따라 오르다가 예천 보문과 안동 북후 방향으로 학가산을 넘으며 느낀건 행정구역 경계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대단한가 하는 회의감이었다.

산과 들의 짐승과 새들은 경계가 없는데 인간이 쳐놓은 담벼락과 깔아놓은 도로에 막혀 인공적인 경계가 쳐져있을 뿐이다. 나 또한 예천인과 안동인이라는 의식이 별로 뚜렷하지 않은 채 오십여 년을 넘게 두 지역을 오고갔을 뿐이다. 경계인에 머물러 있는 것 또한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 본 글은 『기록창고』 4호에 수록된 내용이며 E-book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2020-09-15 오후 3: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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