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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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우리동네 -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
2만 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마애
‘마구 다 없이 살던 시절’ 시집 온 조봉순 할매 이야기
[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8안동·예천근대기행2

 

 
망천절벽 쪽에서 내려다 본 마애 (사진제공: 이주현 이장)

마애, 사람이 살던 뿌리를 간직한 마을

안동시 남후면에서 풍산 방향으로 가는 단호교에 들어서면 여느 시골과는 사뭇 다른 대자연의 품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광대하게 이어진 산맥은 너르고 웅장하다. 단호교를 건너면 바로 왼편에 마애선사유적전시관이 보이는데, 안동에선 최초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된 풍산읍 마애리다.

2007년 ‘마애솔숲 문화공원 조성사업’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주먹도끼, 찍개류, 몸돌, 반입석재 등이 대거 출토되면서 2만 년 전부터 안동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마을이다. 중국에 있는 망천(輞川)과 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지녀 ‘망천’이라 불렀지만, 낙동강 맞은편에 바위를 쪼아 만든 부처가 있어서 ‘마애’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망천절벽과 마애불상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어느 쪽으로 불리든 이곳의 현재성을 고스란히 살린 지명들이다.

특히 마을을 감싸 돌며 흐르는 낙동강과 망천절벽, 강변의 넓은 백사장은 옛날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그 아름다움을 찬탄할 만큼 그 경치가 빼어나다. 낙동강과 강 건너에 망천절벽이 어우러져 계절마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장관을 이룬다.

   
망천절벽 파노라마 사진 (사진제공: 이주현 이장)

『영가지』에 보면 이곳의 풍광을 가리켜 ‘절벽이 옥을 깎아지른 듯 여러 봉우리가 삼면에 경치를 이루고 넓은 들, 맑은 모래, 그 경치와 기상은 언어로 다 형용하지 못하겠다.’고 기록했다. 또 선비들이 영호루에서 배를 타고 망천절벽까지 선유하며 시를 읊은 기록도 있다. 송암 권호문은 1568년 이곳을 유람하다가 “서리 맞은 단풍이 비단보다 붉은데, 비온 뒤의 찬 물결이 쪽과 같이 푸르다. 두보의 곡강이 응당 멀지 않고, 소동파의 적벽에 부끄럽지 않네.”라고 비경을 노래했다.

마애리에서 구석기인들의 삶의 흔적이 발견된 건 우연이 아니다. 일찍이 구석기인들에게도 이곳은 살고 싶은 땅이었던 것이다. 망천절벽의 비경과 함께 안동에서 가장 오래전 사람이 살던 뿌리를 간직한 마을이다.

   

2009년 개관한 마애선사유적전시관  ⓒ 이호민

2007년 마애솔숲 문화공원 조성사업 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주먹도끼를 포함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면서 마애는 사람이 살던 뿌리를 간직한 마을이 됐다

마애선사유적전시관 옆에 있는 마애솔숲은 600년 수령의 소나무가 울창한 가지를 뻗고 있다. 하회마을, 병산서원과 더불어 안동지역에서 일찍부터 명승지로 꼽혀 아이들 소풍지로도 유명했다.

   
600년 수령의 소나무가 사는 마애솔숲 ⓒ 이호민

마애리는 진성이씨 600년 집성촌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송안군 이자수 공이 처음 마을을 개척하여 만년에는 다시 와룡 주촌 마을로 옮겼으나 그 증손자인 흥양이 다시 들어와 마을을 일구었다. 마을은 마애 본동과 시우실로 이루어진 자연마을로 현재 98가구, 주민들은 217명이 살고 있다. 마애 본동에는 거의 진성이씨가 살고 있고, 마애 북쪽 골짜기에 있는 시우실에는 안동권씨, 안동김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산다.

   

고려송안군유허비는 진성이씨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가 이 마을에 입향한 것을 기념해 1983년 후손들이 마을 입구에 세웠다. ⓒ 이호민

마애 본동 입구에 들어서면 마애리 경로당이 보이고 그 맞은편에 고려송안군유허비(高麗松安君遺墟碑)가 보인다. 진성 이씨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가 이 마을에 입향 한 것을 기념해 1983년 후손들이 마을 입구에 세운 비이다.

   

마애석조비로자나불좌상 ⓒ 이호민

마애선사유적전시관 맞은편에 자리한 마애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는데현재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다. 

마애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왜 혼자 남았나?

전통사찰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풍산지역은 유적으로 남은 많은 석탑과 불상을 통해 불교문화가 융성했다는 것을 짐작한다. 마애선사유적전시관 맞은편에 자리한 마애석조비로자나불좌상(유형문화재 제17호)도 그 유적 중 하나이다. 불상 뒤로는 푸른 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주변에 있는 낙락장송들이 불상과 오랜 시간 고락을 함께 했다. 후대 사람들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을 보고 이곳을 절터로 유추하고 있지만 시대는 미상으로 전해진다고. 다만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석조비로자나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갖고 있어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이주현 이장(65세, 진성이씨 망천파 21대손)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신라시대에 망천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불상을 보고 있노라면 절이 사라진 숨겨진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다. 마을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라도 있을까 해서 이장님께 물으니 조금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빈대가 원캉 많아가지고 절을 불 태워서 떠나버렸다 카더라고요. 빈대 모르지요?”

대체 절에 빈대가 얼마나 많았기에 수행하는 스님 속을 백팔번뇌하게 만들었으며 종국에는 절까지 불살라버리게 했을까.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비로자나불상만이 그 정확한 내막을 알고 있을 것인데, 불상은 제 표정을 지워가면서도 천년이 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전설이 사실인지 유무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 빈대가 엄청 많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빈대가 워낙 많아서 절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어쩌면 흩어진 전설의 한 파편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마을을 지키고 있는 이 불상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경외감은 아마도 깊었던 것 같다. 지금은 마을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으니 말이다.

   
마애리에서 태어난 본토박이 이주현 이장 (사진제공: 이주현 이장)

나룻배 타고 망천절벽에 나무하러 가던 시절

기록되지 못한 역사는 이렇듯 풍문만을 남기고 사라지지만 사람살이에서 끈질기게 남은 어떤 삶의 조건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력이 길다.

“그때 절이 있을 때는 실제로 강 건너까지 배를 타고 다녔겠죠. 그건 역사죠. 나룻배는 우리도 만들어서 탔지요. 동네 사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야 나무를 해오거든요.”

   

1978년경 망천절벽 앞 모래사장에서 조봉순 할머니의 둘째 아들 일택 씨가 나룻배 위에 올라타 어른들을 흉내 내며 노젓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시 마애리 주민들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나무를 하러 다녔다. (사진제공: 조봉순 할머니)

마애에서 오랜 시간 그 명맥을 유지하며 근대에까지 내려온 것은 아마도 나룻배가 아닐까. 이 이장도 나룻배에 대한 기억을 또렷이 가지고 있다. 1954년생인 그는 어린 시절 책보자기에 책을 말아 메고 풍산초등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1970년대 초반, 일택 씨의 고모부(왼쪽)와 고모부 친구 분(오른쪽)이 망천절벽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 (사진 제공: 조봉순 할머니)

“저가 학교 다닐 적에도 그 배가 있었는데 굉장히 컸어요. 사람이 타면 한 50여명은 타는 그런 큰 배였어요. 앞산이 전부 우리 문중 산인데, 옛날에는 앞산에 있는 소나무를 베어가지고 목수가 강에서 직접 톱으로 썰어서 배를 제작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대목이셨어요. 배가 얼마나 크냐하면 지게에 나무를 한 거푸 해가지고 오는데, 한 30지게를 싣고도 사람이 탈 정도니 배가 크잖아요. 사진 찍어놨으면 희한할 낀데 그때는 사진기도 없었으니까.”

나룻배는 땔감을 실어 나르는 마을의 중요 이동수단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시 하루에 두어 번 망천절벽으로 나룻배가 다녔는데, 아침 먹고 나무 한 짐 베어오고, 점심 먹고 다시 한 짐 베어오는 식이었다. 겨울철 땔감 준비는 마을 사람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 이장도 어린 시절 어른들을 따라 처음 나무하러 나선 적이 있다. 벌써 50년 전의 일이다.

   

1982년 망천절벽 인근에서 나무를 하는 일택 씨 모습. 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나무를 하여 지게에 지고 나룻배에 실어왔다. (사진제공:조봉순 할머니)

“나무는 할 줄도 모르면서 모처럼 제가 나무를 하러 갔는데 불이 난 산에 나무가 전부 말랐는 줄 알았어요. 그래가 다른 사람들은 자기 질만큼만 지는데, 나는 처음 따라갔으니 뭐 보이께네 전부 벌거이께네 (가벼운 줄 알고) 한 짐 졌거든요. 근데 까끄락진데 내려오다가 지게 째로 돌돌돌돌 몇 바퀴를 구불러버렸어요. 그래가 지게 다 뿌사뿌고 그 길로는 산에 가지도 안하고 나무지게도 없애고 그랬죠.(웃음)”

 

“우리 살 때 생각해보면 원시인이래, 마구 다 없이 살았거든”

조봉순 할머니 이야기

어른들은 그렇게 해온 나무를 풍산장터에 내다 팔기도 했다. 마애리 노인정에서 만난 조봉순 할머니(83세)에게서 그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여기 시집올 때만 해도 마을 어른들이 40대 청년들이었어. 저 물 건너 가가지고 나무랑 알갈비를 좋은 것만 해가지고, 짐도 희한하게 요래 이쁘게 해가지고 풍산장터에 한 짐 지어다 팔면 그게 500원이었어. 요새 생각해보면 5만 원 정도야. 그게 돈이 됐어. 그 돈 받아가지고 석유라도 사고. 사는데 도움이 됐어.”

그런 나룻배도 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사라졌다. 주민들의 삶의 환경과 주변 환경이 바뀌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982년 조봉순 할머니의 둘째아들 일택 씨가 집안일을 돕기 위해 땔감을 하러 망천절벽을 건너가 나무를 한 짐하고 서 있는 모습. 당시엔 나룻배가 사라진 후여서 지게를 지고 직접 강을 건너갔다. (사진제공: 조봉순 할머니)

“지금은 배도 없고, 낭기를 안하는 시대라서 (망천절벽에) 잡목이 많이 우거졌지. 그때는 댐이 없을 때라서, 비가 오면 모래가 굴러 내려와 은빛이 나는 게 아주 보기 좋았어. 자꾸 씻겨가지고 반짝반짝 그랬어. 바깥양반들은 홑이불만 들고 모두 강에 가가지고 여름을 나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때는 벌레가 버글버글 거는 데 살았는데 강가에는 모기가 없었나봐.”

1976년 안동댐이 생긴 후부터는 망천절벽 앞 모래사장도 큰 변화를 겪었다. 댐이 생겨난 이후부턴 비가와도 모래가 씻기지 않아 반짝이는 모래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물을 가둬놨으니까. 나무가 서고 풀섶이 서가지고 재미없어. 지금은 물도 더러워서 쓰지도 못해. 옛날에는 그 물을 먹기도 했는데. 맑아가지고. 옛날에는 선유하기 좋았던 시절이 있었어. 봄으로 꽃피면 화전놀이도 했지. 봄꽃이 필 때 모두 전 부쳐서 먹곤 했어. 우리 살 때 생각해보면 원시인이래. 마구 다 없이 살았어. 다 어렵게 살았으이 내꺼 가지고 사는 사람은 드물었어.”

할머니의 인생은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인생과 함께 집이라는 수레바퀴를 타고 지금 이곳에 정착했다. 남의 집 곁방살이에서부터 현재 살고 있는 마애펜션까지. 할머니가 이곳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좀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우리는 유식한 말을 몰래. 하늘만 쳐다보고 땅만 팠는데, 얘기할 줄을 몰래. 우리 같이 일만 하던 사람들은…”

그러면서 이야기를 풀어가셨다.

진성이가가 38파인데여기가 망천파래왜 망천파냐하면은 수레바퀴 망()’자에 내 천()’자거든낙동강 물이 이렇게 나와서 수레바퀴처럼 둘둘 둘둘 굴러가가지고 병산서원으로 물이 빠진다고거기에 자리를 잡은 동네래우리 집에 가면 확실하게 둘러싼 걸 알아.”

 

의성 처녀, ‘시집살이 십계명’ 꼭 쥐고 마애로 시집오던 날

할머니의 원래 고향은 의성군 신평면 신수동(현 안사면 신수리)이다. 8남매 중 맏이였다.

“열여덟에 결혼해서 뭐 아나?”

18살 꽃다운 나이에 마애리에 사는 얼굴도 모르는 총각 이재석(당시 20세)과 혼인했다. 연줄 혼으로 처녀 총각이 만나던 때였다. 마애리로 먼저 시집 온 고종사촌이 알음알음 다리를 놓은 것. 1953년 12월 18일에 꼬꼬재배하며 신랑 얼굴을 처음 보았다.

   

1950년대 초 예천군 지보면에서 조봉순 할머니의 종고종사촌언니(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결혼식에서. 마애리로 혼인을 연결시켜 준 고종사촌 언니(첫줄 왼쪽 첫 번째)와 함께 참석했다. 첫줄 오른쪽 첫 번째가 조봉순 할머니. (사진제공: 조봉순 할머니)

“그때는 거의 그래 결혼했어. 연애하는 시대가 아니니까. 여기서 전라도 가고 충청도 가는 건 만무하지. 이조시대 때매러 동네 사람들 다 모여서 마당에서 꼬꼬재배 하고.”

그때는 시골 동네에 사진기 가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앨범에는 결혼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여동생 혼인할 때 보니 결혼사진 찍는 게 유행처럼 번지더라는 것. 할머니가 결혼하던 때인 1950년대에는 혼례를 마친 신부가 친정에서 묵고 시댁으로 가는 신행이 있었다. 특히 농촌의 전통혼례풍습에는 신부가 1년을 묵었다 신행을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할머니도 의성 친정에서 한 해 묵고 이듬해 마애리로 왔다. 열아홉 살 신부가 가슴 한편에 꼭 쥐고 온 것은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보다는 할머니가 일러준 ‘시집살이 십계명’이었다.

   

1957년(정유년) 진외조부(조모의 남동생) 환갑잔치 때. 앞줄 왼쪽 첫 번째 앉아 있는 할머니가 시집살이 십계명을 알려주신 분이다. (사진제공: 조봉순 할머니)

그때의 신부들은 어떤 십계명을 가슴에 새겼을까.

“제일 첫 번째가 시집을 가면은 맞아 죽어도 그 집에서 죽어나오지 걸어 나오면 안 된대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친정으로 돌아오면 안 된다는 게 그 시절 할미가 손녀에게 못박아둔 말이었다.

“죽어서 등으로 나와야지 걸어 나오면 친정이 망한대. 시집살이 못하고 나왔다고.”

   

혼인을 언약하는 증서. 당시 할머니가 장롱 밑에 반듯하게 보관하라고 했던 말을 명심하여 이사를 할 때마다 반듯하게 펴서 보관했다. 조봉순 할머니는 결혼 후 지금까지 이 문서를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 이호민

그 시절 여인들의 서럽고 한스러운 시집살이가 그려져 가슴 한편이 싸해진다. 며느리란 신분은 엄동설한에 혼자 내버려진 천애고아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가 신신당부한 것은 또 있다.

“두 번째는 시집을 가거들랑 뭐든지 시집식구들이 시키지 질녀든 시누이든 내가 시키면 안 된대야.”

   

혼인을 언약하는 증서. 당시 할머니가 장롱 밑에 반듯하게 보관하라고 했던 말을 명심하여 이사를 할 때마다 반듯하게 펴서 보관했다. 결혼 후 한번도 펼쳐본 적 없는 문서를 펼쳐보게 된 조봉순 할머니. ⓒ 이호민

낮엔 밭일 하랴 저녁엔 집안일 하랴 바느질하랴 잠잘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바느질하는 손놀림도 재발라야 하지만 숯불 담은 화로에 묻어둔 인두도 꺼내 옷 구김살도 펴야 했다. 할머니는 혹 어린 질녀들에게 화로 같은 거 밀어달라는 부탁도 애초에 하지 말라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시집식구들한테는 나물 좀 다듬으라고 내놔도 안 된다고 가르쳤다.

“세 번째는 앉아서 바느질을 하다가도 시부모님이 오거나 손님이 오면 일나 서서 오셨니껴, 인사하고 손님이 앉거든 앉지, 앉아서 빠이 지 할 일만 하면 안 된대야.”

   

시집살이 십계명을 배울 당시 조봉순 할머니가 붓글씨로 필사한 <강능추월전>. 책이 귀한 시절이라 동네 사람들이 하도 읽어서 표지가 닳았다. 고모가 시집갈 때 필사해두었던 것을 다시 조봉순 할머니가 필사했다. ⓒ 이호민

할머니는 손녀에게 신부수업을 엄하게 가르치셨다.

“지금은 십계명을 다 못 외워. 할머니가 청춘과부래. 스물 서이에 혼자돼가지고 얼마나 강한지 몰래. 할머니가 손주 8남매를 가르치려고 그쿠루 애를 써. 내가 한 가지라도 아는 것이 우리 할머니가 그쿠 그래가지고 좀 안 나은가 싶어.”

   

1940년대 초, 일제강점기 때 조봉순 할머니의 부친(왼쪽 첫 번째)이 예천군 지보면 소화리 소재 지보공립보통학교(현 지보초등학교)에서 오촌들과 함께 찍은 사진.(사진제공: 조봉순 할머니)

이조시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할머니가 알려준 십계명은 손녀의 무탈한 시집살이를 위해서였을 터.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의 시간을 살아야 된다는 말을 멀리 시집가는 18살 보드라운 가슴에 일일이 콕콕 짚어가며 가르쳤다. 청춘과부가 된 할머니는 남들 눈엔 매우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손주들을 끔찍이도 아껴 동네에선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던 손녀에게 가르쳐야 했던 것이 모진 시집살이 십계명이었다니.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미리 덜어주려는 할미의 각별한 마음이 진하게 배어 있다.

   

당시 신부수업으로 소설을 필사한 것에 대해 설명하는 조봉순 할머니. ⓒ 이호민

곁방살이 반년, 남의 집 얼라가 자빠져도 걱정이랬어

그러나 막상 도착한 시댁에서 ‘시집살이 십계명’보다 더 강퍅하게 기다리는 것은 가난한 살림이었다. 시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만 계셨는데, 시집살이를 크게 겪지 않으셨다고. 대신 모질게도 가난한 삶이 시작되었다.

“우리 큰집이 종가(진성이씨 망천파)다 보니까. 우리 종가에서 재산이 전부, 벼슬한 어른 쪽에 재산이지 내 개인 재산이 없는 거라. 어느 종가든 개인재산이 없으니까 지차 자식들한테 물려줄 게 없어. 농사벌이가 없었어. 시집은 종가로 오고, 처음에는 남의 곁방에서 반년 살았어.”

그때는 젊은 사람들이 살림을 차리려고 하면 친척 간에 돈도 안 받고 곁방을 줬다.

“남의 얼라 있는 집이라 애가 자빠져도 내가 걱정이랬어. 남의 애니까 조심스럽더라고.”

남의 집 애 울음소리에도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래서 결심한 게 이사였다. 없는 살림에 이사할 수 있는 데라곤 바로 코앞에 있는 초가도토마리집이었는데, 남의 곁방보다는 안 나을라 싶어서다.

   

이곳에서 6년을 살았다.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지붕만 바뀌었을뿐 아직도 그대로 자리한 조봉순 할머니의 옛 보금자리. 오두막 뒤로는 반년간 곁방살이했던 집이 보인다.

초가삼간에서 6년

살림살이라곤 밥그릇 두 불, 접시 세 개, 버지기 하나

“쪼그만 집에. 쪼그만 방 한 칸, 정지 한 칸 있는 도토마리집이래. 정지 옆에 방 하나 더 달아가지고 겨우 겨우 살았어, 웃마에 그 집이 아직도 붙어 있어.”

1957년 독립된 집 한 채를 가졌다. 그때 조봉순 할머니의 나이 22살이었다.

“그때는 살림살이라고 할 게 없었어. 밥그릇 두 불하고 접시 세 개, 버지기 하나만 들고 나갔지. 아무 것도 없어.”

   

이 방에서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살았다. 비좁았지만 때로는 이웃들이 놀러오기도 했다. 

스물한 살 새댁이 여든 세 살이 될 동안 흙집도 훌쩍 환갑을 넘었다. 일제 시대 때 지어진 작은 오두막은 오랜 시간을 견디면서도 반듯하고 정정했다. 1970년 새마을 운동의 주요사업으로 추진된 농촌의 지붕개량사업으로 지붕만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뀐 채 아직도 근대의 민낯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이 흙벽으론 더 이상 문명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듯. 허리 굽은 새댁이 삐걱이며 방문을 열자, 지붕 서까래가 생선가시마냥 제 속을 훤히 내보였다. 그 아래 내남 없는 가난의 풍경이 펼쳐졌다. 집안 곳곳에는 근대의 시간이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공기마저 그때로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이 방에서 다섯 식구가 복작거리며 살았다. 비좁은 방이지만 이웃이 놀러오기도 했다. 뒤안은 영락없는 옛 흙벽 그대로. 이 집에서 첫째 딸 순랑, 둘째 딸 귀랑, 큰 아들 성택 씨를 낳아 6년을 살았다. 그러나 다섯 식구 먹고 살길은 여전히 막막했다. 1962년, 부부는 다시 두 번째 결단을 내린다. 잠시 고향 마애를 떠나기로.

   
두솔원재사 (사진제공: 안동시청)

살 길 없어 떠난 서후면 두솔원재사,

빨리 벌어 고향가자고 얼마나 허벌나게 일을 시키는지

그해 안동시 서후면 명리에 있는 진성이씨 두솔원재사(兜率院齋舍)로 삼남매를 데리고 떠났다.

“참 그때는 못사는 집이어가지고. 문중에 벼슬한 어른들 (산)소가 많잖아. 자손 중에도 못 사는 사람이 많으니 집에 농사거리도 없고 나갈 데도 없고 직업 없는 사람은 소에 가면 한 재산이 있으니 집주고 땅주이께네 거기 가 살아라, 그런 게 있었어.”

집 주고 땅 주니 아무 밑천 없어도 안 살겠나 싶은 게 집안 어른들의 말씀이었다.

“저기 경로당 앞에 비석(고려송안군유허비)이 있지. 저 어른(송안군 이자수) 산소를 모시는 데가 학가산 밑에 있어. 두솔원이라고. 느티나무가 있고. 저 어른의 시사(時祀)를 모시는 거야. 그래서 가게 된 게 거기래.”

   
13년간 살았던 서후면 명동 두솔원재사. 지난해 7월부터 보수공사 중이다.

진성이씨 문중에는 재사가 여러 군데였는데 재사로 떠난 사람들 중 할머니 부부가 제일 어렸다고 한다. 당시 할머니는 27살, 남편은 29살이었다. 재사에 딸린 땅에 농사도 짓고, 그걸로 1년에 한번 시사(時祀)를 지내는데, 그날은 문중 손님만 130명에서 150여명이 왔다. 제사음식 준비하느라 아낙네 네다섯 명은 거뜬히 와야 큰일을 치룰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에 한번 큰일을 치루지만 남의 땅 부치는 거 보다는 나았는데, 재사에 딸린 논밭에 농사지으니 제법 한 농장거리는 되었다고. 밭 열닷 마지기와 논 여덟 마지기(1,600평) 농사로 일꾼도 두 명 두었다. 보리, 서숙 농사만 지으니 돈이 안 되어 소도 키웠다.

   

1965년경 조봉순 할머니와 두 아들이 두솔원재사 동쪽 툇마루에 앉아 찍은 사진. 왼쪽이 큰 아들 성택 씨(당시 7세 무렵), 오른쪽이 둘째 아들 일택 씨(5세 무렵). (사진제공: 조봉순 할머니) 

“우리 바깥양반이 성질이 강해. 빨리 벌어가지고 고향가자, 고향가자. 얼마나 강하게 그러는지 오이께네 얼마나 허벌나게 일을 시키는지. 죽을 지경인 거래(웃음).”

시집오기 전 농사일 제대로 해 본적 없는 새댁은 어느새 아침상을 물리자마자 들일을 가는 게 여사였다. 설거지를 할라치면 바깥양반은 벌써부터 지게에 바작짐(지게 뒤에 거름 등을 운반하는 싸리바구니)을 한차 지고, 연장을 얹은 채 정지 문 앞에서 성화였다. 설거지도 냅두고 어서 가자 보채는 것이다.

“나도 성격이 급한데 그 사람은 나보다 더 급해.”

   

1970년대 중후반에 명동 사람들과 함께 부산의 어느 해변가로 나들이를 떠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진제공: 조봉순 할머니)

할머니는 얼마나 허벌나게 일을 시켰는지 생전에 할아버지와의 짧은 일화를 들려준다.

“맨날 허름한 옷을 입고, 발에 흙 안 묻은 날 없이 사니 사는 게 요지경이래. 바깥양반은 맨날 빨리 김메라 하고. (웃음) 저쯤 가가지고 뒤에 거들떠보거든.”

그러면서 하는 소리는 “밭에다 꽃놓나 수놓나 빨리 김만 메고 따라온나.”였다.

그러면 할머니는 “당신 메났는 거 덜 멨는거도 메야 되고.” 라고 대꾸했다.

“대충 메고 또 다시 메야 되지 그쿠루 꼼꼼하게 메면 이 농사 다 묵힌대이. 메 놓고 또 메야지.”

“개코도 따라갈라그이 못 따라 갈시더!”

풀 대충 메고 따라오라는 남편과 ‘내 눈에 밟히는 풀 빠자놓고는 못가’는 부인의 실랑이가 한 눈에 그려진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한낮 더위에 밭고랑에서 옥신각신하는 부부의 대화에 웃음이 나면서도 할머니의 자조 섞인 일갈 어딘가에 시원한 통쾌감마저 느껴진다. 그런 한마디라도 해야 다시 호미질 할 힘이 생겼을 터였다. 남편에겐 밭고랑 메는 호미질 하나하나가 고향 마애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부인에게는 그게 언제나 힘에 부치는 것이었다. 빨리 벌어 고향 가고 싶던 할아버지의 집념이 얼마나 강했을지 짧은 대화에서도 엿보인다. 이곳에서 둘째 아들 일택 씨와 셋째 딸 미랑 씨를 낳았다.

“요새 생각하이께네 우리가 독재 정권이따!(웃음) 영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텔레비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 정치했다고 하는데, 우리 영감이 나한테 독재정치 했는데. 요동도 못하게 그래. 돈은 뭐 백 원짜리가 어에 생겼는동 천 원짜리가 어에 생겼는동 보여줘야 알제. 일만 하고 자기 사다주는 것만 먹어야 되지 나는 사러 가면 안 돼. 성격이 완고했어.”


소 멕이다가 좀 클라그면 팔아서 밭 사고

고향에 우선 집터부터 맡아 놓고

명동에서 30리(13km) 떨어진 고향 마애리가 남편은 그렇게나 돌아가고 싶었다. 어쩌다 고향에 가면 집터 자리부터 미리 궁리해뒀다. 현재 마애펜션 두 채가 있는 이 집터는 원래 외삼촌 형수네 밭이었다. 바깥어른은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어도 집터부터 먼저 맡아뒀는데, 당시 사촌형수를 붙들고 “아지매요, 아지매요, 이 땅 파거든 내한테 파소.”라고 미리 말해둔 것.

“지금 요 집터래. 그때 당시에 요게 밭이었거든. 내가 보이 서른 살도 안 된 사람이 어릴 때부터 고향 들어올 준비를 하긴 했어. 한 3년 있다보이 형수가, 새서방님, 이 땅 사소. 그러는 거라. 송아지 멕이던 거 팔고. 밭 420평을 샀어. 말도 마, 어쩌다 소라도 한 마리 멕일라치면 억지로 클라그면은 덜 큰 놈 팔아버리고. 또 나락 몇 가마이 보리 몇 가마이 이래 팔아가지고 고향에 땅 한 뙈기 사놓고. 논은 한 여남은 마지기 샀어. 그라고는 이 집 터를 샀어.”

그런데 그렇게나 성질 급한 바깥양반도 웬일인지 곧장 이사 가자 소리는 하지 않았다고. 집터를 사놓고도 가족이 마애로 돌아온 것은 13년만의 일이다. 다시는 고향을 떠나지 않기 위해 단단히 준비해서 돌아갈 심사였던 것. 그러나 밭에 뭘 심어도 돈 되는 게 드물었던 시절이었으니, 기댈 수밖에 없는 건 두 부부의 정직한 노동뿐이었다.

“주로 재배작물로는 보리랑 서숙이래. 생명 유지하는 데는 밭식물로는 그거래. 돈 되는 게 드물었어. 요새는 여자들도 품값을 6만원 받는다는데, 우리 때는 쌀 한 되(1.6kg)밖에 못 받았어. 그때는 없는 사람이 못 일어서. 내 나이 마흔 전(1975년 이전)에는 품값을 쌀 한 되씩 줬어.”

살이는 팍팍해도 명동에서 이웃 간에 정은 다복했다고 한다.

“그때는 전기불도 안 들어오고 전화도 없던 시대래. 근데도 동네 사람들이 간드렛불을 들고 막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모돠. 우리 또래가 쿵작이 잘 맞아가지고 잘 화합하고 그랬어. 마을사람들끼리 야유회라도 가면 놀이도 실력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 어떤 사람들은 고고, 부르스, 탱고, 못 추는 게 없는 사람들이 있어. 그케 잘 노는 사람도 있어. 잘 노는 사람들은 지금도 환하게, 영화에서 촬영하는 것처럼 눈에 어른어른해.”

   

부부는 고향 마애로 돌아간 지 7~8년 후에 명동 사람들과 금담계를 별도로 결성해 20년간 유지하며 이웃간 정을 나누기도 했다. 사진은 충북 보은사 법주사로 야유회를 갔을 때.

어느 날은 충북 보은 법주사에 갔다가 길을 잃었는데 멀리서 들리는 북소리를 듣고 “저거 우리 북이따.” 하며 이내 찾아낼 정도였다고 한다.

“북소리만 들어도 장단이 우리가 노는 장단 인 걸 알아. 어디 놀러가면은 그래 끌고 가이 알잖나. 가만히 냅두면 어에 놀러가노. 일만 하고 있는 사람이.”

사는 건 어려워도 이웃 간 서로 손을 이끌어 주며 챙겨주던 그때를 할머니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회상한다.

그렇게 13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살림이 불었을 무렵,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바깥양반이 이제 먹고는 산다, 가자. 이래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지”

산전수전 다 겪은 후 다시 마애로 돌아왔을 때, 소회가 궁금했다.

“나는 내 고향이 아니니까 솔직히 별 마음도 없지. 신량 고향이니깐 뭐(웃음).”

명동에서의 고된 노동에 대해 일침 섞인 한마디 던지시며 싱긋 웃어버리셨다.

   

1982년 큰딸 순랑 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결혼할 때 기역자 기와집에서 식구들이 함께 찍은 사진. 바로 뒤편에 분홍색 한복을 입은 여인이 조봉순 할머니. (사진제공: 조봉순 할머니) 

“이제 먹고는 산다, 가자”

13년 만에 기와집 짓고 고향에 돌아와

1976년에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돌아와 기역(ㄱ)자 기와집을 지었다. 뱃속에는 막내딸이 있을 때였다. 새마을 노래가 전국 곳곳에 울려 퍼지던 1970년대에는 초가에 살던 서민들은 기와집과 양옥에 살아보는 것이 소망이었다. 당시 새로 지은 기와집은 마애리에서 제일 근사한 집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기억자 기와집이 유행이랬어. 그 당시엔 집이 좋다고 잘 짓는다고 지었어. 내가 마흔 되던 해였지.”

기와집은 본채에 큰방, 마루, 중간방, 사랑방이, 좌측면엔 부엌, 방, 뒤주가 있었다. 아랫채에는 방, 마구, 광, 헛간 등이 마련돼 있어 농사짓고 살기에는 가장 적합한 형태였다.

“그런 집이 이 동네엔 없었어. 이 동네에 우리가 처음으로 잘 지어가지고 온 집이래.”

당시 기와집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셋째 딸(70년생)이 하는 얘기가 국민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느그 집이 제일 부자따, 집이 좋으이께네. 그랬대. 그래가 셋째 딸이 나도 우리가 부잔줄 알고요, 걸음 걸을 때마다 발을 탕탕 울리며 댕겼니더왜요. 요새 생각하이 부자도 아닌데. 아-들이 느그 부자다, 부자다, 그래가지도 부잔줄 알았다 그캐.”

70년대 코찔찔이 아이들의 부러움에 찬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집으로 의기양양 걸어왔을 딸의 발걸음에 집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초가지붕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 밥상머리 앞에서 뾰루퉁한 입을 내밀며 우리 집도 기와집으로 짓자고 조르다가 한 대 쥐어 박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친구네 부모님이 다른 동네에서 그렇게 쌔가빠지게 일한 줄은 모른 채로 말이다. 고향에 돌아온 후 할아버지의 태도도 바뀌었다고 한다.

   
큰딸 결혼 보내던 날 마루에서 (사진제공: 조봉순 할머니)

“고향에 와설랑 일 많이 하고 살잔 소리를 안 하대. 고향에 온 그 이듬해 모심기할 때 대번 맹장에 걸려 맹장수술을 받아가더라고. 여기 와서는 그렇게 강력하게 일을 안 하더라고. 그래 살디만은 세월이 흐르이께네 큰 직업도 없고. 생산 되는 돈이 없잖나. 한 달에 한 가마이 먹어도 견디고 살긴 살지. 애들 학교 시키고 돈이 없잖나. 요새 같으면 그래가지고 못 산다 그래. 영감 살았을 때 내가 이켔다. 에이고, 그때는 그래 사는 줄 알고 암말도 안하고 살았지 그쿠 그러면 요새 같았으면 이혼했니데이.”

할머니의 뒤늦은 항변에 투박한 경상도 할아버지는 그예 지지 않고 이런 한마디를 던지셨다고.

“살다보면 싸우고 지지고. 하나이 죽으면 자동 이혼되는데 뭐할라꼬 이혼하노. 조금 더 살면은 자동이혼 되는데.”

생전 할아버지의 익살 섞인 재담에 할머니는 어제처럼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그렇게 부부는 같은 말을 조금은 다르게 하며 토닥토닥 평생을 살아왔다. 한평생 해로한 부부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해학과 생의 유한성이 버무려진 말이다. 할아버지는 여생을 그 집에서 사시다가 74세에 돌아가셨다.

“나는 내 고향이 아니래가지고 못 느끼는데, 우리 바깥양반이 돌아가시고 나서 죽은 뒤에 뒷동산에 묻히니까, 시누이가 그캐. 형님, 오빠가 고향 빨리 간다 그디만은 뒷동산에 묻힐라고 일찍 올라그랬나보오.”

   
아버지가 사둔 집터에 둘째 아들이 다시 집을 지었다.

어무이, 집을 다시 지을라고요

기와집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붕이며, 마루며, 여러 번을 고쳐가며 마애리에서 38년을 살았다. 어느 날 객지에서 성공한 둘째 아들이 와서 그랬다.

“어무이, 집을 다시 지을라고요.”

“아이고, 야야, 말짱한 집을 왜 새로 짓노?”

“아이래요. 요새 사람들이 한옥 집에 그냥 못 들어오니더. 고향을 하나이는 지켜야 되니까. 내 집을 지어나야 되니더.”

“그럼 내가 죽어도 이 집은 남으이께네 내가 죽거들랑 지어라.”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무이 살아계실 때 지어야지. 어무이 사시다가 남으면 우리가 살지요.”

실컷 돈 들여 고쳐놓은 집이 할머니는 못내 아쉬웠다고. 그뿐이었을까. 오로지 고향 땅에 돌아오기 위한 일념 하나로 가난한 시절을 통과해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오래된 시간이 그 집 속에 응축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토록 고향에 돌아오고자 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까. 객지에서 성공해서 돌아온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기와집을 허물고 아버지처럼 지금 가장 좋은 집을 지었다. 그리고 이름도 고향 이름을 따서 ‘마애펜션’으로 붙였다.

   
망천절벽이 정면으로 보이는 조봉순 할머니의 보금자리

유한한 삶에서 누군가는 사랑하는 땅이 있다. 그곳에 그가 사랑하는 흙이 있고, 사랑하는 강이 있다. 그의 몸 어느 일부분에 그 자박거리던 돌멩이에 대한 기억이 흐르고, 은모래 반짝이는 따사로움이 살고 있다. 그것들이 자꾸만 그곳으로 가자고 보챈다. 그곳을 우리는 ‘고향’이라고 부른다. 고향 마애를 사랑한 할아버지, 그리고 아들. 할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어 집안 곳곳을 보여주시다가 2층 테라스에 가보라며 손수 안내해주셨다. 그곳에서 보니 마애의 절경, 묵묵한 망천절벽이 또렷이 보였다.

할머니의 집에는 이제 외지 사람들이 찾아온다.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가며 망천절벽의 수려함에 탄성을 지른다고 한다.

“우리는 만날 보이 그크루 모르는데, 여 오는 사람들은 마구 그카대. 와 본 사람들이 맹 또 와.”

오로지 고향 땅에 돌아오기 위한 일념 하나로 가난한 시절을 통과해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인생. 집의 여정으로 짧게 들여다보며 한 인류학자의 묘비명을 떠올렸다. 그는 “우리는 대지를 사랑했으나 머물 수는 없었다”고 썼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삶을 유추하며 마애리 곳곳에 유장하게 흐르던 강물과 반짝이던 은모래빛, 솔바람 소리를 들어본다. 

 

 

김은경
2018-09-04 오전 1: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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