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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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ㆍ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원도심 삼산동
[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9 안동·예천 근대기행 (9)

  • 서미숙
  • 2020-01-21 오후 4:14:01
  • 4,202

# 시내서 보시더

"집이 어디~껴?"

"시내래요."

"어디서 만나면 좋을리껴?"

"시내서 보시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사이에는 지금도 통용되는 안동 표준말이다. "시내래요."에서 시내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기 전 안동시 전체를 의미한다. "시내서 보시더."에서 시내는 주로 안동시에서도 삼산동 일대 원도심을 지칭한다.

삼산동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접근했다. 먼저 기록으로 존재하는 근대 삼산동을 찾아보았다. 근대라 함은 일제 강점기에서 6.25 전쟁 이전까지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기억하는 안동 삼산동은 대부분 1960년대부터였다. 오래 그곳을 지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시대 이야기를 기록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래서 삼산동 근현대 이야기로 폭을 넓혔다.

 

네이버 지도에 나타난 삼산동 구역

 

 

드론으로 본 삼산동 (제공 구자을)

 

삼뭇들, 삼뭇돌, 삼산동

삼산동은 안동시보건소 앞에서 동쪽으로 삼뭇들, 장거리들이 있어서 삼뭇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사묘 앞에서 내려오며 이 지역에 망호루, 제남루, 문루 등 누각이 서 있었다. 망호루 옆에 객사가 있고, 객사 앞에 내삼문이 보인다. 안동부 당시 안동의 수령이 제남루 앞에 많은 백성들을 모아 놓고 죄인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일벌백계一罰百戒의 교훈을 일깨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종루가 있는 거리라 하여 종로라 불렀다. 현재 신한은행 앞 차 없는 거리에서 중앙파출소에 이르는 통로를 말한다.

 

2019 광복절 삼산동 문화의 거리 (서미숙)

 

3.1 독립운동의 성지, 삼산동 신한은행 앞

일제 강점기에는 신한은행 앞에서 옛 스쿨서점 방향으로 난 도로를 본정통으로 불렀다. 본정은 일제가 잠식한 거리, 일제의 경제 수탈기구가 모여 있었던 곳이다. 금융조합, 대구은행안동지점, 식산은행 등이 있었다.

삼산동 신한은행 앞은 3.1운동의 성지다. 신한은행 앞은 이상동이 혼자 만세운동을 했던 곳이다. 이상동은 석주 이상룡 동생이다. 임청각은 태어나면서부터 유학을 공부했던 집안이지만 그는 1906년 기독교를 수용했다. 이상동은 영양 석보면 지경리에 가서 주로 포교활동을 했다. 남자현 지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인근 소산동에서 포교를 하고 교회를 지었던 분이다.

1919년 3. 13. 안동에서는 처음으로 만세를 불렀다. "너희들은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독립할 것이다."외치며 단독으로 만세운동을 했다. 종이로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었다. 기독교인들이 논의를 하다가 검거되는 바람에 단독으로 하게 되었다. 태극기를 종이에 그려서 흔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다음 장날 3. 18일에 그곳에서 다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안동교회에서 태극기를 준비해서 기독교 인사들이 서쪽에서 들어오고, 송천동에서 동쪽 유림들이 동문동을 지나 물밀 듯이 들어오고, 북쪽에서는 예안에서 밤 세워 전날부터 걸어왔다. 그 전날 예안에서는 안동지역 대규모 3.1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곳이다. 현재 도산면 서부리 선성산에서 만세를 시작한다. 교회 쪽에서 오고, 면사무소 직원, 유림들이 각각 세 갈래로 모여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했다. 구금자를 석방하라며 관청들이 몰려있던 지금의 웅부공원으로 가서 시위를 하다가 40여명의 순국자가 나오기도 했다.

 

일제는 일본국경일 때마다 일장기 계양을 강요했다. (사진으로 보는 근대안동. 서문당)

 

 

안동읍성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삼산동을 지키는 사람들

 

동인당 한의원 (서미숙)

 

#2대에 걸쳐 운영하는 동인당 한의원

동인당은 2대에 걸쳐 한의원을 운영중이다.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은 1918년생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태화오거리 근처에서 한약방을 하다가 삼산동 우체국 건너편으로 이사했다. 권기종 원장 (1956년생)이 병원에 딸린 집에서 살 때 광제병원에서 태어났으니 그 이전에 삼산동 시대를 맞이한 셈이다.

부친은 88세로 생의 마지막 날까지 일을 하다가 밤에 돌아가셨다. 복 많은 어른이다. 슬하에 13남매를 두셨다. 7남 6녀 중에 위에 형들은 약사, 유도선수, 건축가가 되었다.

 

동인당 한의원 권기종 원장 (서미숙)

 

부친의 권유로 넷째인 기종 씨가 한의학을 공부하여 가업을 잇게 되었다. 늘 한 곳에 갇혀서 진료하니 좀 답답하다고 한다. 편안한 인상에 조용조용 말하는 분위기가 한의사에 어울리는 분이다.

2004년 12월까지만 해도 동인당 한약방 1층은 부친이, 2층은 아들이 각각 진료를 봤다. 부친의 후광에 가려져 빛을 못 보던 시절도 있었지만, 침은 아들이 책임졌다. 지금은 경안약국 자리까지 매입하여 한의원을 확장 했지만, 찾는 환자 수는 예전 같지 않다. 요즘 비싼 인건비를 감안하면 환자가 많아도 감당하기 어렵고, 혼자 진료하기엔 적정수준이라니 다행이다.

"막상 공부해보니 한의학은 매력적인 학문이다. 다만 정부에서 뒷받침이 안 되고, 양의사들 파워가 세어서 기를 못 펴고 있는 실정이지요. 한방을 모르는 양방 의사들은 무시하고 미신화하니까. 심지어 젊은 사람들은 한약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는 편견을 갖고 터부시한다. 옛날부터 한약을 먹어온 사람이 자식 데리고 꾸준히 찾는다."

한약은 양약에 비해 비용부담이 크기에 의료보험제도 개선이 필요한 실정이다.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삼산동 터줏대감 동인당이 오래 그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이 붓으로 쓴 처방전 ⓒ서미숙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은 처방전을 붓으로 썼다. 지금도 부친이 쓴 처방전을 보관중이다. 부친이 사용하던 오래된 약장과 아들(현재 원장) 약장이 나란히 자리한다. 오래된 약장에 지금도 하수오 등 약재를 보관한다.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지만 한의학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며느리나 친척 중에서라도 가업을 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기종 원장은 중학교 때까지 삼산동 동인당 한의원 1층에서 살았다. 고교와 대학시절은 서울로 갔지만 졸업 후에 다시 삼산동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용상동에 거주하지만 근무시간은 내내 삼산동에서 보낸다.

 

부친이 쓰던 약장 (서미숙)

 

동인당 한약방 앞이 예전엔 비포장 도로였다. 소달구지가 지나다니고, 소 지르메에 똥통을 싣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길에 소똥이 밟히기도 하고, 가끔 말도 다녔다. 지게에 솔잎을 지고 팔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갓 쓰고 한복 입은 어른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길가에 리어카 짐꾼들이 햇볕을 쬐며 쭉 늘어서 있었다. 당시 짐 싣던 분이 요즘 동인당에 오기도 한다.

그는 1968년 5월 18일 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안동시 운흥동 <문화극장>에 수류탄 폭발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휴가 나온 육군 하사가 애인의 변심에 앙심을 품고 극장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수십 명의 사장자를 내었다. 즉사 5명 부상자 44명이나 되는 대형 사고였다. 동인당 바로 옆이 시내 유일한 외과였던 <광제병원>으로 가는 작은 골목이었다. 환자를 업고 바삐 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경회루가 있던 자리는 현재 윤가네부대찌
개 ⓒ서미숙

동인당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경안약국>, <노라 양장점>, <창신당>,그리고 코너가 구멍가게였다. 구멍가게 옆에 당시 유명한 <8.15제과점>이었다.

 

조흥은행 옆 왼쪽코너에 <클레오파트라> 옷가게, 다음이 <스쿨서점>, 학용품을 팔던 <광문사>, 코너에 <영창피아노>가 있었다. 스쿨서점 맞은편에는 <수미사>란 양복점이 있었다.

동인당 오른쪽 코너엔 철물점 <대창사>가 있었다. 대창사 옆 골목 안에는 유명한 중국 요리집 <경회루>가 자리했다. 당시 외식이라면 <경회루>에 가서 짜장면을 먹거나 잔칫날 구 시장 <해동식당>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동인당 바로 맞은 편에는 <안동우체국>이었다. 지금은 그 자리가 삼산동 우체국이다. 삼산동 우체국 옆 코너엔 일식요리점 <공주식당>이었다. 공주식당이 사라지고 교학사가 들어섰다가 최근 몇 년째 가게가 비어있다.

-삼산동에 오래 살아보니 어떠신지요?

"예전에 구시장이 번화할 땐 시장 가깝고 편리했는데 요즘은 외곽지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다소 불편해졌다."

그에게 삼산동은 고향이자 안식처이다. 어릴 적 눈이 오면 눈 속에 연탄재 넣어 친구들과 눈싸움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는 삼산동을 떠나면 불안할 정도로 삼산동 토박이다.

#일공공일 김옥현

"그때만 해도 시계기술은 우주과학만큼이나 대단하게 생각했던 시절이었죠."

김옥현 사장(69세)은 예천 보문이 고향이다. 열여덟에 시계기술을 배우러 안동시 삼산동 <남방상사>를 찾았다. 신한은행에서 서쪽 통로 당시 <광문사> 맞은편에 가게가 있었다. 당시엔 시계와 안경을 함께 취급했다. 안경과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시계 배울 자리가 없어 안경을 익혔다.

"처음에 안경기술을 배운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시시하게 생각했다. 그런 걸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1968년 3월, 현재 일공안경 자리에 있던 남방상사에서 김옥현이 렌즈메터기로 안경도수를
측정하는 중이다.

 

가게주인 아우는 신시장에 <남방시계점>을 열고, 형님인 민병필씨가 지금 일공안경점 자리로 옮겨서 <남방안경점>을 했다. 그때 남방안경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남방 안경점에서 일하던 시절의 김옥한 (제공 김옥한)

 

처음엔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월급 600원을 받았다. 6개월 후에 800원으로 인상되었다가 그 뒤에 1,300원을 받았다. 옷이 귀해서 주인이 입던 옷을 얻어 입었다. 명절이 되면 티셔츠를 선물 받기도 했다. 그렇게 경력이 쌓였다. 그간 모은 돈과 본가에서 논을 팔고 소를 팔아 지원을 해주었다. 당시 소 40마리 시세로 <남방안경점>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스물다섯에 가게주인이 되었다.

전 주인이 <남방안경점> 상호를 못 쓰게 했다. 아우가 하던 <남방시계점>에서 안경을 취급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동방안경>으로 바꾸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왔다.

정밀한 기기를 다루는 만큼 그는 세심하고 철저하다. 업무일지는 기본이고 개인 일기도 날마다 쓴다. 업무일지 여백에 안동 사투리 메모가 빼곡하다. 안경 맞추러 온 고객들이 일상으로 쓰던 말을 바쁜 일과 중에도 꼼꼼히 기록해놓았다. 개인정보가 담겨 일지 원본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사투리 몇 개를 옮겨본다.

"안경 쓰면 첩에 집에 간 것 긋다."

"내가 87이래. 나이 많은데 전좌 보고 잘 복키는거 ..."

"안경이 작꾸 내리왓사"

"호부레비 뒤따라 옥까봐 식겁했다"

"옛날에 여무까시라고 백내장 비슷한거 있었는데 걷어내는 의원을 만나야 되는데..."

"얄브제라? 했다 잘 안보이드라"

"본방치기 한 동네 남자와 결혼"

"마커 18금이껴"

김사장은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오래된 책과 사진도 수집한다. 지금까지 수집한 스크랩북이 수십 권이라 한다. 보여준 파일에는 안경 쓴 유명인들 사진이 많다. 정작 그는 사진 찍히는 걸 사양했다.

 

2019년 11월 현재 일공공일 안경점 (서미숙)

 

프랜차이즈 바람은 안경이라고 예외가 아닌가 보다. 2002년1월 9일 상호를 <일공공일>로 바꾸었다. 일공공일은 전주에 본부가 있으며 전국적으로 400개 이상 가맹점을 둔 업체다. 현재 가게 면적은 예전의 다섯 배 크기로 늘어났다. 김사장 외에 직원이 세 명이다. 43년째 함께 일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딸 김남씨도 안경학을 전공하고 합류했다. 넷째 아들도 안경학과 재학 중에 군에 입대했다니 얼마나 든든할까. 앞으로 자녀들이 가업을 이어갈 테니 <일공공일>은 삼산동에서 건재할 것이다.

# 안동우체사-부산우편국 안동출장소-안동우편국-안동우체국-안동우체국 삼산동 분점-삼산동우체국

 

왼쪽 삼산동우체국ⓒ서미숙

 

휴대전화와 이메일과 택배가 없던 시절, 우체국은 우리 생활과 더 밀착되어 있었다. 군대에서도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요즘 청춘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화가 없는 집이 많았다. 시외전화를 하려면 우체국이나 전화국에서 시외전화를 신청하고 상대방과 연결시켜 주는 교환원이 있었다.

펜팔이 유행했던 그 시절, 잡지에는 펜팔을 원하는 주소가 즐비했다. 밤새 손편지를 써서 빨간우체통에 넣던 기억 하나쯤은 묻어둔 장년층이 많을 것이다. 우편 집배원이 빨간자전거를 타고 집집마다 배달을 다녔다.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기다리며 설렘 가득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는 연말연시가 되면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부치러 오는 사람들로 우체국이 성시를 이루었다.

요즘 우체국은 편지보다 택배와 금융기관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추석과 음력 설날 무렵이면 택배 선물배달로 더 분주하다.

안동의 체신업무는 1895년 12월 07일 <안동우체사>로 출발했다. 1902년 6월 10일 <부산우편국 안동출장소>로 바뀌었고, 1907년 6월 12일 <안동우편국>으로 개칭했다가 1950년 1월 12일 <안동우체국>이 되었다. 과거엔 안동우체국이 지금의 삼산동 우체국 자리에 있었다. 1984년 안동우체국이 당북동으로 이전하고 안동우체국 삼산동 분점이 되었다가 이듬해 <삼산동 우체국>으로 개칭했다.

# 대구은행 안동지점-조흥은행-신한은행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핵심 상권에 금융기관이 자리한다. 일찍이 삼산동엔 신한은행을 중심으로 무진회사(현재 삼산동 우체국 자리)란 일제의 고리대금업체가 있었다.

1916년 4월22일 안동군 부내면 동부동에서 주식회사 대구은행 안동지점으로 개점했다. 1941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동군 안동읍 본정 3정목 114로 주소가 변경되었다.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합병으로 인하여 주식회사 조흥은행 안동지점으로 되었다. 194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동군 안동읍 삼산동 114로 주소가 변경되면서 삼산동이란 동명을 쓰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안동 지역에 금융기관의 각 지점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1973년 안동농업협동조합이 업무를 시작했다.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서문당

 

 

조흥은행 1989년 안동법원 출장소 개점홍보 현수막을 내걸었다.(제공 조흥은행)

 

1950년 7월29일, 6.25 전쟁으로 일시 휴업을 했다. 1950년 11월 11일, 원점포는 소실되고 동문동 446-3 지점장 사택에서 영업을 재개했다. 1951년 삼산동 114로 신축이전한 건물이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1963년 경상북도 안동시 삼산동 114로 주소가 변경되었다. 도로명 주소 도입으로 안동시 중앙로 41이 현주소이다. 이렇듯 신한은행은 우리나라 근대사와 맥을 같이했다.

 

신한은행 안동지점 2019년 11월 20일 (서미숙)

 

#삼산동 성결교회

성결교회는 2019년에 66주년을 맞이했다. 1953년 10월 20일 교단 십자군 제 3전도대에 의해 안동시 삼산동 136번지에서 천막을 치고 장기 부흥 중에 본부의 보조로 192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설립한 교회이다. 설립유공자는 천세광목사, 이성봉 목사이다. (출처: 사진으로 보는 안동 성결교회 60년사)

 

안동성결교회 (출처 : 사진으로 보는 안동성결교회 60년사)

 

 

66주년 맞이한 안동성결교회 (서미숙)

 

# 안동에 칼라사진 시대를 연 성광칼라

성광칼라는 삼산동의 아이콘이다. 만주에서 사진관을 하던 형 이인홍의 영향으로 이인호가 1963년 안동에서 처음으로 <성광사>란 사진관을 열었다. 초기에는 사진 재료도 팔았다. 이인호 사장은 자식이 없었다. 성광사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서대교 씨가 양자 들다시피 했다.

1970년대에 서대교 씨가 인수하여 <성광칼라>로 상호를 바꾸었다. 1980년부터 성광칼라 사진 기사이자 책임자로 근무했던 남성진 씨가 1999년에 인수하여 23년째 3대 대표이다. 현재 아들이 사진영상학과를 졸업하고 4대를 이을 준비를 하며 출근 중이다.

성광칼라는 경북 북부지역 처음으로 칼라 현상을 시작했다. 아날로그로 암실 작업을 하던 시절에는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 1990년대 후반 남대표가 인수받을 무렵이 성광칼라 전성기였다. 졸업시즌이면 필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과자 사놓고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차츰 필름이 자취를 감추고 디지털시대로 바뀌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작품사진이나 특별한 용도가 아니면, 사진을 파일로 보관하고 모니터에서 보는 걸로 만족하는 추세이다. 서사장이 남사장 외가 쪽 친척이다.

 

칼라사진을 처음 현상한 성광사 (출처 : 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안동의 모습)

 

 

3대를 이어가는 성광칼라 (제공 성광칼라)

 

-삼산동에 살아보니 어떠신지요?

"옛날에는 삼산동이 최고 상권이었는데, 시내가 죽어가니 많이 처졌지요."

-앞으로 삼산동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요?

"주거지역 지어주고, 주민이 있어야 장사가 되지, 외지 사람 상대로만 장사하면 상권에도 신경을 덜 쓰게 된다. 상권이 살아나려면 인구가 늘어나고 지속적으로 구도심을 살려줘야 한다."

성광칼라는 점포와 주택이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주하는 주민이다 보니 동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삼산동이 옛날의 영화를 다시 찾을 해법은 없는 걸까?

삼산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삼산동 고우네 의상실 권오걸 사장

 

#삼산동의 산 역사 권오걸

권오걸 씨는 이천동 출신이다. 석수암 앞에서 살았는데 농사가 힘들어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서울에 가서 오전엔 라사라, 국제복장, 오후엔 노라노 식으로 치열하게 양장 기술을 배웠다. 큰누이가 경비를 대주었다. 디자인공부, 재단을 배우고 이대 앞에서 재단사 보조를 거쳐 고향으로 내려왔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의상실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1970년대 안동에 의상실이 120여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세 때 삼산동 우체국 앞 <노라 의상실>을 거쳐 1972년에 <유 의상실>로 내 가게를 시작했다. 중고생들의 교복을 주로 만들었다. 까다로운 여학생들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교복 잘하는 집으로 소문이 났다. <하얀집> 재단사, <동아양장점> 미싱 재봉도 했다.

1976년부터 삼산동 삼방사 옆에서 <고우네 의상실>을 열었다. 만19년간 호시절이었다. 안동 시내 멋쟁이들은 대부분 그가 만든 옷을 입어봤을 것이다. 나 또한 결혼 예복으로 만든 검은 정장은 아직도 갖고 있다.

논노, 코롱, 기성복 나오면서 맞춤옷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때부터 기성복으로 전환했다. 맞춤을 하다가 기성복을 팔기만 하니까 처음에는 무지 수월했다. <헌트><쉐인>< 휠라클래식> 순으로 품목을 바꾸어가며 삼산동에서 오래 버티었다.

삼산동에서 집을 팔든 임대를 하든 권사장 한테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삼산동의 산 역사이다. 덕분에 어디 가서 누굴 만나면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도 꿰고 있었다.

<고우네 의상실> 시절 권오걸씨는 옥류관 자리에 살았다. 그전에는 옥류관 자리가 ‘참사랑’예식장이었다. 이웃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고 들은 이야기가 있겠다 싶었다.

 

 

"현재 안동호텔과 안동관 자리에 광제병원이 있었다. 허박사가 병원을 하셔가지고 재산을 많이 일구었다. 자제들도 잘 되어 국제변호사도 있고, 교수도 있고, 의사도 있다. 허동섭 씨가 몸이 아팠어요. 일본인가 미국인가 가서 치료를 하고 제2 인생을 사시니까, 자제들도 잘 사니까 어른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혼자 안동호텔 2층에 수발하는 사람 두고 기거하시다가 98세까지 살다가 돌아가셨다."

# 광제병원과 호연장학회

 

1960년대 광제병원 (호연장학회 제공)

 

 

생전의 허동섭 박사 (호연장학회 제공)

 

광제병원 설립자는 의학박사 허동섭 許東燮이다. 원래 일본사람이 지어서 사용하던 2 층 적산가옥이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미 군정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휴전 직후에 허박사가 불하받아서 개보수하여 병원을 그 자리에 개원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1953 년경 부터 1978 년 경까지 운영했으며, 개설된 진료과는 외과, 산부인과였다. 특이한 점은 일찍이 X선 장비도 도입하여 골절 등의 정형외과 진료도 했다는 것. 입원실이 20에서 30실 정도 규모였다. 병원 입구는 지금 삼산 우체국 앞 도로에서 안동호텔로 들어오는 쪽에 있었다.

 

1960년대 광제병원 의사와 간호사(호연장학회 제공)

 

1985 년 5 월, 유지를 받들어 재단법인 호연 장학회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반반 정도, 지원대상은 안동시 관내에 있는 고등학교로 부터 졸업생 중 대상자를 추천 받아서 면접을 통하여 선발한다. 지금은 한해에 5 ~10 명 정도 대학생 중심으로 지원한다. 장학금 재원은 허박사께서 그간 운영하시던 광제병원 건물을 헐고 신축한 안동호텔 건물로부터 나오는 임대료와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 수입을 주재원으로 한다.

 

광제병원 가족들 1060년대 (호연장학회 제공)

 

 

옛 광재병원자리 안동호텔 (서미숙)

 

#옛 <삼방사>주인 김건종

1949년생 김건종 씨는 의성김씨 집성촌 내앞 마을이 고향이다. 8남 2녀 중, 9남매가 모두 서울에 산다. 셋째인 그이만 안동에 살며 선산을 지킨다. 그와 삼산동은 일찍부터 인연이 깊다.

그의 선친(고 김시박)이 삼산동 삼방사 자리에 일찍이 터를 잡았다. 6.25 사변 후 1950년대 초반 선친이 건물을 매입하여 <상공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당시 사옥으로 사용했다. 인쇄업을 하다가, 문경 시멘트 경북북부지구 총판대표이사였던 부친은 2대, 3대 무소속 경북도의원을 지냈다. 부친과 삼촌 김경종이 <상공인쇄소>를 운영했다.

통학하기 힘든 시절이라 중학교 때부터 안동 시내로 왔다. 삼방사 자리 뒤에 한옥이 있었다. 당시는 그 한옥이 삼촌댁이여서 자취를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훗날 삼촌으로부터 한옥을 매입하여 결혼 후 그 집에서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삼산동 140 ? 5, <상공주식회사>가 있었던 부친의 건물에 1973. 3. 3. <삼방사>를 개업했다. 1973년부터 2000년까지 29년간 삼방사란 문구점을 운영했다.

-문구점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아버지가 안동에서 의성 김가 우리 일가가 하지 않는 업종을 찾아봐라. 찾아보니 다 있는데 문방구가 없어. 우리 조상이 선비인데 학자들한테 필요한 게 지필묵이다. 그래서 문방구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한편 김건종 씨는 (77~91)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안동공급소장을 맡아 일년에 100만권씩 공급하느라 갈빗대가 세 대 부러질 정도로 힘들었다. 무시로 (가마니로 포장된 = 허적대기 포장)포장된 교과서는 당시는 박봉의 봉급과 공급 경비를 받았다. 학자는 못 되었지만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책 팔고 책 나르는 일을 했다.

 

삼방사 한옥에서 살던 시절 김건종 가족과 처남 김영훈 (사진제공 김건종)

 

 

연탄난로를 피우던 초창기 삼방사 내부, 사진 속 남매는 성인이 되었다.
아들은 지금 삼산동 문화의 거리 3층에서 만화카페 벌툰을 운영한다.

 

 

80년대 삼방사 앞에서 기념촬영한 막내동생 김순종 (사진제공 김건종)

 

작은 문구점으로 시작해서 1984년 부친으로부터 그 건물을 구입했다. 33세에 건물주가 되어 건물을 신축했다. 삼방사를 개업하고 나서 문구점 관리는 부인이 주로 맡다시피 했다.

이후 삼산동의 <마켓 21>부터 <베스킨라빈스> <CNA (상공인쇄소 자리)> 까지 건물을 사들여 임대업을 한다. 아들이 건물관리를 하고 노후를 보내며 뒤를 봐주는 편이다.

 

1988년 삼방사 건물 개축당시 모습, 삼방사 옆에 고우네 의상실, 톰보이, 동방당 안경점 간
판이 보인다. (사진제공 김건종)

 

 

도시재생사업으로 환경개선을 한 문화의 거리 ⓒ서미숙

 

 

천만광광객 유치를 위한 플래시몹 (서미숙)

 

"삼산동이 다운타운이 된 것은 교학사 자리, 농협지부 자리에 예전에 버스터미널이 있어서였다."고 김건종씨는 회고했다. 문화의 거리가 차 없는 거리가 되면서 인근 상인들은 오히려 피해를 보는 쪽이 많다고 한다. 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거리는 접근성이 떨어져 매출에는 지장이 있는 모양이다.

김건종씨에게 삼산동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우마차가 다닐 때 소 엉덩이에 소똥 떨어질까 봐 가마니를 받히고 다녔다. 삼방사 맞은편 가게였던 대구전기 함동훈 씨 부친이 먼지 날지 말라고 날마다 길에 물을 뿌렸다."고 한다.

# 삼산동에서 멋 부리고 놀았던 이상호

 

탈 쓰나 안쓰나 똑같다는 이상호 선생 (서미숙)

 

사람의 끼는 타고 나는 모양이다. 인간문화재(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69호 백정 역) 이상호 씨는 삼산동에 대한 추억이 많다. 1945년 해방동이다. 남부동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삼산동에서 놀았다.

"다섯 살 때부터 구두 신고 가죽가방 메고 남부동에서 삼산동을 거쳐 대건 유치원에 다녔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목성동 성당에 신부님으로 오셨다. 안동초등학교 시절부터 연극도 하고 끼가 다분했다."

아들 셋 낳아 놓고 아버지는 6. 25 때 좌익으로 몰려 경찰에 잡혀가서 돌아가셨다. 연좌제 때문에 공부할 생각도 안했다.

"예전에는 사장 뚝을 중심으로 해서 구시장 쪽에 사는 아들은 멋쟁이고, 맘보바지, 나팔바지입고 살았고, 야바위꾼 모이는 거는 베전 골목 부근에 많이 모였지."

 

안동중학교에서 열린 시민체육대회에서 트위스트 추던 이상호, 사진 왼쪽 첫번째

 

경안고등학교 시절에는 양복점에서 제일모직 바지 맞춰 입고, 흰 운동화 대신 백구두를 신고 폼잡았다. 당시 삼산동에는 구두점이 많았다.

"'국제양화점'이 중소기업은행 앞에 있다가 삼방사 옆으로 옮겼다. 김창현이 서울 가서 수제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워왔는데 안동 시내 건달들은 국제양화점 구두를 다 신었다."

삼산동 조흥 은행 뒤에는 <경일식당>이란 한식집이 있었다. 그곳은 이상호 선생 조모님 언니가 운영했는데 갈비탕을 주로했다.

"세멘 거랑이라 그랬어요. 안동시청 앞에서 어개골까지 흘러가는 하천을 안동의 세느강이라고 했지요. 맘모스 뒤쪽으로 해서 남부동 우리 집(최유근 안과 맞은편, 당시 대동식당) 앞으로 흘러갔죠. 비오면 반도 가지고 고기도 잡고 그랬어요."

"6.25사변 전에는 농협에서부터 대구은행 뒷길로 해서 맘모스제과 뒤쪽에 큰 거랑이 홈플러스 앞쪽으로 흘러갔다. 농협자리가 버스 터미널인데 삼환여객 하나 뿐이었다. 삼환여객 버스도 우리집(남부동 최유근안과 맞은편으로 당시 대동식당 ) 앞으로 해서 지금 홈플러스(당시 철도국) 앞을 거쳐갔다. 오가다로 원동기 돌리듯이 손으로 돌려서 시동을 걸었다."

버스터미널은 중소기업은행 자리로 이전했다가 홈플러스 자리를 거쳐 현재 송현시대를 맞이했다.

<대구전기> 옆에는 70년대 중반 안동에서 유명한 <8.15제과점>이 있었다. 맘모스 제과점이 생기기 전에 중고생들의 데이트장소였다. 80년대 중반에는 <대구전기> 옆에 숙녀복과 잡화를 주로 취급하는 <신라백화점>이 있었다.

 

삼산동 대구전기상회 4층서 1970년 9.12 개국한 안동문화방송(출처:안동문화방송 30년사)

 

1970년 9월 12일, 안동시 삼산동 99번지 대구전기상회(현재 중앙시네마 맞은편) 건물 4층에서 안동방송이 첫 전파를 발사했다.

처음에는 AM 라디오 중심이었다. 당시 2,3,4층을 임대해서 5년간 방송업무를 수행했다.

1971년 한국문화방송의 가맹사가 되면서 안동문화방송으로 상호를 바꿨다. 1975년 9월부터 남문동 145-3, 대구은행 건물 3층은 1985년 태화동 신 사옥 으로 옮길 때까지 약 10년 가까이 MBC의 애환이 서린곳이다. 1980년 언론 통폐합과 함께 ㈜문화방송의 계열사로 변경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출처 : 안동문화방송 30년사)

1970년대 후반 '별이 빛나는 밤에'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인기 있었다. 시그널 뮤직만 나와도 가슴 떨리던 시절이었다.

이상호는 1980년경 안동 MBC 1기 전속가수로 활동했다. 돌아가는 삼각지, 비 내리는 명동거리 등 배호 노래를 주로 불렀다. MBC에서 성우를 해보라고 해서 매주 일요일 아침 가십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광복 20년 연속 소설 낭독도 했다.

 

mbc 가수 시절 희방사 야유회. 왼쪽 기마 앞에 선 이상호와 안동 MBC상징(출처:안동문화방송 30년사)

 

군대에서도 연예단 소속이었다. 1972년부터 탈춤을 시작한 그는 타고 난 춤꾼이다.

"춤 춰가지고 디다는 소리는 안 한다. 안동 친구들이 날 보고 저 새끼 돌았는 놈이라 그래. 가수나 연예인 하면 돈이나 벌겐데. 재주도 좋은 놈이 저거 한다고."

돌았다 카던 말던 내 혼자 끝까지 해보면 안되겠나 싶었다. 하도 그카니까 나중에 친구들이 그래. "니는 탈 쓰나 안쓰나 똑같다."

#삼산동에 활기를 불러오는 사람들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 (서미숙)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

중앙시네마는 삼산동 문화의 거리 자존심이다.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안동 사람들의 문화 갈증을 해소해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다. 2000년 8월에 정사영씨가 개관한 극장을 2014년 2월부터 한태희 씨가 인수했다.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바뀐 건 2009년 부터이다.

<워낭소리>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독립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살리고 영화진흥공사를 영화진흥위원회로 바꾸면서 독립영화관 지원사업, 예술영화 지원사업이 진행되었다.

한 대표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충청도 보은에서 자랐다. 청주에서 살다가 1994년 KT 발령을 받고 안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2009년 12월 퇴직하고 시민단체 활동하면서 중앙시네마를 알게 되었다. 당시 공동체 영화, 시류에 민감한 영화 같이 보기 운동을 하면서 <우리 학교> <서해 여기>등 북한 관련 영화도 상영했다.

전 주인은 중앙시네마와 구시장 안에 진성극장을 같이 운영했다. 2004년 안동에 멀티플랙스가 들어오면서 단관영화관은 문을 닫는 시점이었다.

 

중앙시네마 내부 (사진제공 중앙시네마)

 

"안될 줄 알았어요. 그래도 해야겠다. 예술영화 전용관이라 예술영화지원사업이 있으니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수도 있고, 큰 이득은 없지만, 손해 보지 않고 현상 유지할 수 있으면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으로 시작했지요."

"박근혜 정부 초기에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프로젝트>란 독립영화를 상영 못하게 하는데 했어요. 그랬더니 "지원 사업에서 탈락되어 2014년 첫해엔 손해를 봤죠. 2,500만원 사비가 들어갔어요. 2015년 <다이빙 벨> 상영으로 예술영화 전용관 지원 사업이 없어졌어요. 그러자 왜곡 현상이 생긴 것이죠. 영화 상영할 곳이 없어지자 2016년 유통배급 지원 사업으로 계약을 갱신했습니다."

"2017년 정부 바뀌고 문화정책이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간 셈이죠. 문 닫을까 하던 중 사회적기업 운영으로 가기 전 단계인 사회적 기업 육성가 사업이 생겨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최근 예술영화전용관운영 지원 사업으로 감독을 초대하고, 테마별 영화상영과 기획전, 시나리오 입문과정도 해왔다. 내년에는 영화제작사업 일환으로 영화비평, 단편영화 제작교육 등 계획 중이다. 좋은 영화를 상영하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늘 감사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사용하던 영사기는 장식품으로 밀려났다. ⓒ서미숙

 

#집밥이 땡기는 날은 태함식당 골부리국

 

할머니의 손맛으로 만든 밑반찬과 골부리국 (서미숙)

 

<태함식당>은 집밥이 땡기는 날 가는 단골집이다. 중앙파출소에서 뒤에서 임치순 할머니가 53세부터 19년째 운영 중이다. 한결같이 단아한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맵짜다.

"내 금소 동네서 컸잖니껴. 안동포 나는 동네. 어릴 적에는 골부리 넣고 된장도 찌져 먹고, 친정엄마한테 골부리국 끓이는 거 배웠지요. 처음에는 소머리 곰탕도 하고 닭 볶아주고 해 보이 술집도 밥집도 아닌 것이 어중간해. 석 달 만에 치워 부랬어. 그때부터 골부리국 한 가지만 해."

반찬도 모두 할머니가 손수 만든다. 정갈한 밑반찬과 계절별로 나물 반찬을 준비한다. 사계절 빠지지 않는 매뉴가 콩가루 무쳐 찐 부추 무침이다. 토속적인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점심시간에는 인근 직장인들이 몰려온다. 입소문을 듣고 할머니들이 곗날에 찾기도 한다.

서른둘에 혼자되어 아이들 키우느라 힘들었다. 안동역 앞에서 여인숙을 했다. 돈 빌려줬다가 떼이는 바람에 신경 써서 큰 병을 얻었다. 쉰한 살에 직장암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원장이 움직이라 해서 태함식당을 시작했다. 그때 내 죽었다 생각하고 골부리국 가격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골부리국전문 태함식당 (서미숙)

 

가격이 착한 대신에 한 그릇은 팔지 않는다. 둘 이상은 함께 가야 할머니도 상 차린 보람이 있다니 기억할 일이다. 막내아들(43세)이 요즘 와서 도와준다. 앞으로 가게를 이어받으려고 배우는 중이다.

"아침 7시 전에 나와서 준비하면 11시 반부터 점심 장사를 해요. 골부리국 떨어지면 문 닫아 부래. 요즘 국을 사가는 사람이 얼매나 많은 동, 저녁에는 일찍 문 닫는 날이 많애. 일요일도 쉬지 않고 문을 연다."

주방에 데쳐놓은 얼갈이배추와 파가 선명한 녹색이다. 거기에 부추와 골부리를 넣고 밀가루를 풀어 걸쭉한 맛을 낸다. 할머니는 음식은 재료가 좋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쪼록 대를 이어 삼산동 맛집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오래 해야 된다고 손님들이 그꾸 나싸. 6시 내 고향에도 세 번이나 소개하라 그는 데 아(안) 했어."

#삼산동 유감 

문화의 거리에서 서점이 사라지다

한 때 삼산동에는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을 중심으로 <스쿨서점>과 <교학사>가 나란히 같은 통로에 있었다. 스쿨서점이 삼산동 중앙파출소 옆 버스승강장 앞으로 옮겼다가 2011년 끝내 문을 닫았다. 그때만 해도 충격이었다. 시내에 나가면 가끔 들러 잡지라도 뒤적이던 아지트가 사라져 몹시 허전했다.

50년 전통의 서점, 교학사도 어느 날 삼산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교학사 서점 자리는 몇 년째 비워져 있다. 새로 옮겨 간 곳은 남부동으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교학사는 55년째다. 장사숙 사장이 1965년 예천에서 창업해서 하다가 안동으로 와서 47년 하셨다. 장남 장우영이 5년 가까이 부친을 도왔다. 장사숙 사장이 돌아가시고 2010.11부터 처남 손질걸 씨가 인수했다. 2018.6월 남부동으로 이사했다. 문화의 거리에서 50년이 넘은 서점이 사라지는데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11월 11일 서점의 날이다. 제1회 때 그는 문 닫아야 할 서점을 살리고, 지역 서점을 지켰다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았다. 

 

몇 년째 비어있는 교학사 서점 자리 (서미숙)

 

서점이 온라인 업체에 이길 수 없다. 책방 하나 없는 도시는 너무 삭막하다. 젊은 친구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다. 책 사러 오는 분들은 연세가 있고 책 읽는 게 몸에 밴 분들이다.

교학사 손대표는 "오십 년이 넘는 가게를 찾아서 스토리를 만들면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시에서는 표시를 해주자."고 제안했다.

몇 집 건너 빈 점포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삼산동을 돌다 보니 도심공동화가 피부로 느껴진다. 삼산동 핵심 신한은행 앞에 세 코너가 몽땅 비었다. 가게 유리마다 임대문의만 잔뜩 붙어 있다. 어쩌다가도 아니고 몇 집 건너이다. 삼산동 전체를 파악하면 숫자가 꽤 된다. 현재 가게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지금 있는 사람들도 전부 나가고 싶을 걸요."

도시재생사업을 한답시고 혈세를 쏟아부어도 효과는 미미하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다가 유령의 도시가 될까 두렵다.

 

임대ⓒ서미숙

 

 

임대ⓒ서미숙

 

 

임대ⓒ서미숙

 

 

임대ⓒ서미숙

 

#에필로그

더위가 한 풀 꺾일 때부터 삼산동을 돌았다. 낮에도 밤에도 아침에도. 장돌뱅이처럼 돌았다. 문화의 거리에선 깜놀이벤트도 하고, 버스킹 공연도 한다. 천만관광객 유치를 위해 플래시몹댄스도 한다. 반짝이벤트는 그 때 뿐이다. 지속적인 뭔가가 필요하다. 경제가 어려우니 소비가 위축되고 악순환이 거듭된다. 날이 갈수록 거리에는 임대문의 딱지가 늘어만 가니 답답해진다. 자본주의 논리로만 방치하기엔 심각하다. 문화의 거리에 걸맞은 분위기를 만들 수는 없을까. 이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을 해법은 뭘까. 아 옛날이여! 흥성거리던 시내가 그립다.(글/ 서미숙 doragiseo@hanmail.net)

서미숙
2020-01-21 오후 4: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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